위대한 고딕 화가 시모네 마르티니

Simone Martini

2018-11-11     아츠앤컬쳐
Annunciazione tra i santi Ansano e Margherita -1333 Uffizzi Firenze.jpg

[아츠앤컬쳐] 이탈리아를 방문한 한국 관광객이나 학자들은 대부분 로마시대 이후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 문화기를 르네상스 시대로 생각한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마니에리스티, 그리고 벨리니와 카르파초를 위시한 베네치아파 미술가등을 통해 이탈리아 문화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태리 문화의 가장 중요한 시기는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감소한 1230년에서 1347년경이다. 슈바벤의 프레드리히 2세(Frederick II)의 시대이자 흑사병으로 야기된 위기상황에 이르는 기간으로, 모든 서양 예술의 개혁과 르네상스의 씨앗이 될 위대한 시인들과 예술가들이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ANNUNCIAZIONE PARTICOLARE 1333

예를 들자면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문학작품 ‘신곡’을 쓴 단테(Dante Alighieri)와 위대한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Leonardo Fibonacci)가 활동한 시대이고, 미술 분야에는 조각가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를 위시한 특출한 고딕 건축가들을 얻었으며 무엇보다 이탈리아 회화사를 유명하게 만든 조토(Giotto)와 그의 화파(畵派)가 탄생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중요한 화파들이 생겨났으며 대중적 인지도와는 별개로 예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예술가들이 활동했다. 이 시기 문화는 대도시의 유산을 넘어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는데, 피렌체, 로마, 베니스, 만토바 등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유명 예술가들과 시인들에 의해 문화가 형성되던 르네상스와는 달리 크고 작은 여러 도시에 많은 예술가들이 활동했다. 이탈리아에서 유일하게 최초의 국민문화를 표명한 기간이라 할 수 있다.

investitura cavaliere (1314-1318)

많은 사람들은 회화의 혁명가인 조토를 알고 있지만 반면 1300년대 토스카나 화파를 대표하는 화가 시모네 마르티니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위대한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삶’을 집필한 화가이자 미술 사학자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마르티니의 출생시기를 1284년으로 본다.

그의 출생에 관하여는 보편적으로 시에나(Siena)의 산테지디오(Sant'Egidio)지역에 거주하던 마르티노(Martino)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피렌체 남서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산제미아노(San Gemignano)에서 프레스코화의 벽면을 제조하던 장인(匠人) 마르티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세부 사항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벽면 제조 작업과 주위 예술가들을 보며 성장한 시모네의 예술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외 30세 이전의 교육적 환경이나 삶에 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시에나에 거주한 사실과 토스카나 화파의 유명 화가였던 두초 다 본인세냐(Duccio da Boninsegna)의 화실에서 회화 기법을 배웠다는 내용들은 전해지고있다.

시모네 마르티니의 위대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시에나의 고딕 양식에대해 이해하여야한다. 1300년 초 시에나에는 약 4만5천 명의 주민이 살았다. 같은 기간 파리(Paris)에 약 8만 명이 살았던 것에 비하면 작은 도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에나는 부유하고 안정된 도시로 매우 중요한 고딕 문화의 중심지였다.

​Maestà di simone martini, siena palazzo pubblico, 1315-1321​

무엇보다 고딕 양식의 요지로 중세 이탈리아의 가장 훌륭한 건축물 중 하나인 푸블리코 궁전(Palazzo Pubblico)이 세계적인 미관으로 손꼽히는 캄포 광장(Piazza del Campo)에 세워졌다. 시모네 마르티니는 이러한 문화적 환경과 함께 예술가로 탄생했다.

그가 약 20~25세였을 때 그린 ‘아기를 든 성모(Madonna con il bambino)’나 ‘긍휼의 성모상 (Madonna della Misericordia)’과 같은 일부  작품들은 그 시대 종교적 주제를 지닌 회화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그는 푸블리코 궁의 새로운 방들을 위한 프레스코화를 의뢰받으며 뛰어난 예술적 도약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세계지도(Mappamondi)의 방에 이탈리아의 1300개의 작품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 여겨지는 ‘마에스타(Maestà)’를 시작으로 작업에 몰두한다. 두 차례에 걸쳐 완성된 이 작품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마르티니의 목적이다. 물론 그림의 주제는 당시 관습에 적합하게 종교적이다.

MAESTà – PARTICOLARE -PALAZZO COMUNALE SIENA

그러나 성모는 주변 성인들과 아기로부터 동떨어진 허공의 부정확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으며, 풍부한 고딕 양식의 모티프로 장식된 두 측면을 지닌 보좌에 앉아있다. 성모는 왼팔에 아기를 받치고 있는데 아기의 왼손에는 라틴어로 쓰여진 종이가 들려 있다. 그 내용은 《DILIGITE IUSTITIAM QUI IUDICATIS TERRAM》로 “정의를 지니라, 땅을 정의하는 자여”로 풀이된다. 이 프레스코화의 위대함은 장면의 비종교적 특성이다. 비록 그림은 종교적 성격을 지니지만 성모는 공주와 같이 표현되었으며 천사들과 성인들은 그녀의 대신들과 같이 표현되었다.

PARTICOLARE DELLA Madonna_della_Misericordia._Pinacoteca.(1305-1310)_Siena

그 시대에는 절대적으로 혁신적이었던 비종교적 형상이었다. 종교적 목적이 비종교적이 되는 것, 그리고 이탈리아의 공동체에서 벗어나 변모하는 새로운 사회의 비종교적 목소리에 가담하는 것, 이것이 시모네 마르티니의 위대함이다.

시모네 마르티니의 걸작 중 시에나의 위대함을 시사하는 작품으로 ‘폴리아노의 귀도리초(Guidoriccio da Fogliano)’가 있다. 귀도리초는 1327년 시에나와 늘 원수 관계였던 피사(Pisa)로부터 마렘마(Maremma)와 아미아타(Amiata) 지역의 자체적 영토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시에나에 자신을 바친 고결한 장군이었다. 이는 당시 이탈리아 도시들의 세속적인 역사와 정치 상황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Annunciazione tra i santi Ansano e Margherita, -1333, Uffizzi Firenze

시모네 마르티니의 삶을 통틀어 가장 예술적이며 기념비적인 작품은 1333년에 탄생한 ‘안사노와 마르게리타 성인이 있는 수태고지(Annunciazione tra i santi Ansano e Margherita)’이다. 이 작품은 마르티니의 최고의 걸작으로 시에나궁(Duomo di Siena)의 측면 제단을 위해 제작된다. 주로 이 작품의 관람자들은 빈번하게 궁에 드나들던 사람들이며, 종교 역사와 성경 속 이야기들에 관해 삽화로만 배움이 가능했던 문맹자 또는 하급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 작품에서 마르티니는 고딕풍의 공간을 형상화하는데, 놀라운 수태고지의 주제는 백합꽃만이 그려진 금색 바탕, 즉 중앙의 빈 공간에 표현된다. 시모네 마르티니의 천재성은 바로 금색의 빈 공간에 있다. 그는 당시 모든 예술가들이 방이나 집, 또는 교회나 건물을 배경으로 수태고지 장면을 그리던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무런 배경도 없는 황금색 바탕을 회화적 공간으로 택하여 수태고지를 그렸다. 그것은 마치 공백의 배경이라는 순수한 비물질적 공간을 사용한듯 보였지만, 오히려 그 비물질의 공간은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었고 그림은 건축적 개념으로 변모되었다.

RICCARDO RICCIO DA FOGLIANO Siena – SALA del Mappamondo- Palazzo Pubblico 1328.jpg

시모네 마르티니는 자신만의 종교적 사고와 개념을 형상화하는데 성공했으며, 그의 공백의 수태고지는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장소에 세워진 고딕 성당과 같이 순수로 가득 찬 공간을 탄생시켰다. 그는 ‘개념적 화풍’의 수태고지를 통해 막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곧 아비뇽으로 불려가 교황의 궁정을 위한 작품에 투입되었다. 조토의 작품을 능가한다고 평가받는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는 그를 동시대의 화가 중 가장 뛰어난 위엄과 상상력의 대가로 만들었다.

번역 | 길한나 백석예술대학교 음악예술학부 교수

글 | 로베르토 파시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