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슈트라쎄

2020-12-01     아츠앤컬쳐
의사당 앞에서 본 링슈트라쎄와 빈의 핵심구

[아츠앤컬쳐] 전차는 링슈트라쎄(Ringstrasse) 위를 미끄러지듯 달린다. 차창에는 도로 주변에 세워진 많은 우아한 공공 건축물을 비롯하여 건물과 건물 사이에 조성된 아름다운 정원과 숲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빈(Wien)은 라틴 및 이탈리아 명칭인 비엔나(Vienna)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 도시명이 지닌 어감처럼 품위 있는 여인과 같은 도시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도시는 막강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황궁이 소재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였으니 말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지닌 빈이 가진 물리적인 특징 중 하나라면 널찍하고 멋진 대로가 빈의 핵심구역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도로는 ‘링슈트라쎄’, 즉‘ 순환도로’라는 뜻으로 간단히 링(Ring)이라고도 한다. 이 도로의 폭은 57m, 총 길이는 약 5km가 되는데 이토록 품위 있는 도심의 도로가 있는 도시가 지구상에서 몇 개나 있을까?

오늘날 유럽 여러 곳에 남아있는 중세의 성곽도시들처럼, 빈도 중세에는 도시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도시성벽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더욱더 굳건하게 보강되었는데, 가장 위협적이었던 세력은 오스만 튀르크(터키)였다. 오스만 튀르크는 1453년에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는 그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헝가리를 비롯한 동부유럽을 손아귀에 넣었고, 그다음에는 오스트리아 본토로 침공하여 1529년과 1683년에는 빈을 오랜 기간 동안 포위했다.

빈은 풍전등화 같던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이 굳건한 도시성벽 덕택에 그래도 안전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 전투의 양상이 바뀌는 바람에 도시성벽은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즉 나폴레옹의 군대가 오스트리아 제국 본토를 침공하여 1805년에는 아우스테를리츠에서, 1809년에는 발그람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도시를 포위하여 시간을 끄는 지구전이 아니라 아예 들판에서 한 판 붙어 승부를 빨리 가리는 전투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은 옛날처럼 군대로 빈의 도시성벽을 포위하여 공방전을 벌이지 않고 빈에 그대로 무혈입성하다시피 했다.

링슈트라쎄 너머로 보이는 시청사

오스트리아를 정벌했던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난 다음 1815년 이후부터 오스트리아는 다시 옛날처럼 보수왕정체제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폴레옹 등장 이후 전 유럽에 뿌려진 자유사상은 마침내 1848년에 시민혁명으로 이어져 유럽 곳곳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이 해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신임 황제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빈의 도시풍경을 완전히 바꾼 장본인이다. 그는 빈을 새롭게 개조하기 위해 1857년 11월 20일에 기존의 도시성벽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순환도로를 만드는 대대적인 도시계획안에 서명했다.

한편 그가 이 계획을 승인한 것은, 도시성벽이 있는 자리에 대로가 뚫려 있으면 시민폭동을 진압하기가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그는 1848년에 있었던 시민폭동을 진압할 때 도시성벽이 방해가 되었던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링슈트라쎄가 있으면 시가지가 더 정돈될 뿐 아니라,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광이 더욱더 빛을 보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링슈트라쎄 도로변의 국립오페라극장

이리하여 도시성벽이 완전히 철거되고 오랜 공사 기간을 거쳐 마침내 1865년에 링슈트라쎄가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자 빈 시민들은 열광했다. 그 후 링슈트라쎄 도로변에는 오페라극장, 미술 아카데미, 미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의사당, 궁정극장, 시청, 빈 국립대학 등 많은 공공 건축물이 세워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빈의 귀족층과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많은 중산층 계급을 위한 개인 건물들도 주변에 세워지게 되었다.

이 건축물들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취향에 맞게 모두 고대 그리스, 로마,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 등 역사에 등장했던 과거의 양식을 교과서처럼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 그러니까 링슈트라쎄는 한 마디로 지구상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옛날 양식 복고풍 건축물의 전시장이 된 셈이다.

글 | 정태남
건축분야 외에도 역사 음악 미술 언어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활동하는 필자는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도 하고 있으며, 그동안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로마역사의 길을 걷다>,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등을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