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힐링이다
[아츠앤컬쳐] 두꺼운 종이를 물에 적신다. 어린 시절에 사용하였던 홀바인 물감이다. 붓에 시원한 파랑을 흠뻑 담았다. 젖은 하얀 종이에 푸름이 머금어 들어간다. 음악 소리가 들린다. 물을 푸근히 담은 종이는 번지는 효과로 평온한 감성을 만들어내고 그 위 바로 진한 주황의 항아리를 닮은 곡선을 그려 넣는다.
색이 좋다. 어린아이가 모래 장난을 하듯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해소가 된다. 무념의 상태로 쉽게 빠져드는 느낌이다. 재미나다. 미술과 힐링? 어느 날에서부터인가 힐링이란 단어가 세상에서 꽤나 종종 쓰여지고 있다. 힐링이 필요한가 보다. 참아내는 기능을 상실해버린 현대인이라 한다. 물질의 풍요와 정서적 충만의 조화는 중요한 시대의 화두이다. 참아내기보다는 해소 또는 정화해보는 것은 어떠할는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이 정화의 시간이라 하시던 이성근 작가의 말씀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종이에 색을 담으며 명상하듯 그림을 그리고 싶은, 흩뿌려놓은 색 속에서 잠시 쉬어가고 싶은 충동을 안겨준 인연이다.
이성근 작가의 작품은 아름답다. 언젠가부터 예술작품에 대해 표현할 때 ‘아름답다’는 단어는 금기였다. 예술은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감이 뿌리를 내려버려서일 테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아름답다. 너무도 아름다워 매혹적이다. 그의 작품은 새로움보다는 존재에 관한 사고가 담겨 있고 사고는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있다.
그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 오묘하다. 가벼운듯하면서도 깊이 있는 신비한 기운을 뿜어낸다. 같은 건물에 작업실을 사용하였던 동료 이두식 작가는 올해 초 홍익대 정년퇴임 전시오프닝 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는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삶을 돌아보게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그의 작품은 화려하고도 발랄하다. 요즘 들어서 처음으로 삶에 여유와 기쁨을 느끼신다는 그는 치열한 작품활동을 해왔다.
1954년 충청남도 서산 출생. 건축가가 되려는 꿈을 안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을 시작하여 홍익대학교 금속조형디자인과 졸업, 현재 홍익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초기에는 주로 중량감이 있는 철작업을 하였다. 인간, 삶, 사랑, 자연, 빛, 우주에 관한 철학적 고뇌와 철을 직접 깎아내는 육체적 노동으로 치열한 시간을 보내었다. 1990년 중반 그의 작업세계는 큰 터닝포인트를 맞이한다. 동일한 형체들에 중량감이 강한 철작업이 아닌 가볍고 얇은 철사를 사용하는 새로운 작품제작방식을 도입하여 안을 비우는 “비움”과 인간의 관계성을 표현한 “이음”의 개념을 담아내었다. 1996년 광주비엔날레 전시에는 중량감이 있는 옛 작품들을 아래에 설치하고 안이 비어 있는 가벼운 신작들은 위로 띄워서 설치하여 이성근 작가의 작업 터닝포인트를 한눈에 볼 수있게 하였다.
텅 빈 공간, 수많은 얇은 철사들의 이어짐으로 형태가 만들어진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고 이어져 문명이 만들어진다. 그 ‘이어짐’들은 다양한 유기적인 형상들을 만들어내지만, 그 안은 텅 비어있다. 비어있기에 안과 밖은 통한다. 빈 공간을 두어 안과 밖이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진 한국의 전통 가옥과 전통 의상이 담고 있는 ‘통함’의 철학과 흡사하다. 삶에 대한 또 사람의 관계성에 대한 그의 생각의 중심에는 ‘비움–공(空)–무(蕪)’가 있지 않을까 한다.
무수한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함께 일구어낸 제국, 인간문명의 중심에 ‘텅 빔’이 존재한다. 비어있는 공간을 통해 빛이 투과하여 그림자라는 드로잉을 만들어낸다. 정적이고 한국적인 미와 철학을 담고 있다. 빈 공간은 작품이 은은한 빛과 어우러져 생명을 얻는다. 작품과 여백 그리고 빛, 세 요소의 조화로 인해 작품은 비로소 완성된다. 그의 작품은 여백을 말한다. 노자의 생각처럼 비우고 또 비워서 그리하여 마음에 향기와 새로움을 담으라 한다. 마음의 무게를 가벼이 하고 삶을 고스란히 평안히 살아가기를 다독여 주는 듯하다.
글 | 장신정
전시 & 프로그램 기획, 이천국제조각심포지엄 수석 큐레이터, NYU 예술경영석사. 전 MoMA P.S.1. 전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