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심 고리키의 사랑 이야기
[아츠앤컬쳐] 막심 고리키(Maxim Gorky, 1868~1936)만큼 생전에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도 드물 것이다. 러시아에는 이러한 고리키를 기리며 그의 필명이 붙은 도시나 거리, 학교가 많다. 고리키는 무려 5번이나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으며(결국 수상을 하지는 못했다), 소련 시대에는 가장 많은 책을 출간하는 작가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오늘은 고리키의 위대한 문학사적 업적을 뒤로 하고, 그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고리키는 19살 때 마리야 데렌코바를 짝사랑했지만, 결국 그녀의 마음을 얻어내지 못했고, 이 일을 비관한 그는 가슴에 총을 겨누고 만다. 다행히 총알은 심장을 비껴가 폐에 박혔고, 후에 이것은 그가 결핵을 앓게 되는 원인이 된다. 시간이 흘러 그가 21살에 철도역에서 일할 때 그는 자신의 상사의 딸인 마리야 바사르기나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에게 청혼을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고리키와의 관계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딸과의 결혼을 반대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리키가 혁명적 사상에 심취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이념을 추구하는 짝을 찾으라고 조언하였다. 훗날 일을 그만두고 떠나면서도 고리키는 마리야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영원히 간직했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그녀의 가족을 물질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1893년에 고리키가 25살이 되던 해에 그는 자기보다 10살 연상인 이혼녀 올가 카민스카야와 동거를 시작했다. 올가의 직업은 산파였다. 하지만, 이들의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다. 올가의 전남편이 올가를 돌려놓으려고 이들을 괴롭혔고, 후에 서로 오해가 쌓여서 이들은 갈라서게 되고 만다.
28살의 나이에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혼을 하게 되는데, 상대는 예카테리나 볼지나라(페쉬코바)였고, 그녀는 ‘사마르스카야 가제타’라는 신문사에서 교정자로 일하고 있었다. 30살이 될 때까지도 문법적인 실수를 하던 고리키의 글 역시 그녀가 교
정을 봤다고 한다. 그들은 1897년에 결혼을 했고, 막심이라는 아들과 카쨔라는 딸을 낳았다. 하지만 그들은 어린 딸을 병으로 잃은 후에 부모로서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간신히 유지하던 부부의 연을 끊게 된다.
이후로도 그는 마리야 안드레예브나라는 여배우와 사랑을 나눴고, 마리야 부베르크라는 그의 비서와도 동거를 했다. 사실 작가라는 직업이 갖는 특수성 때문인지,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의 여성 편력을 먼저 접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리키는 다소 신사적인 사생활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무려 다섯 번이나 노벨문학상 수상자 후보에 올랐던 그의 사생활이라는 호기심에 이끌려 글을 썼지만, 그러한 그 역시 어쩌면 늘 진정한 사랑을 갈구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그의 그녀들 덕분에 그의 작품 세계가 더 다채로워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고리키의 여자들이 궁금해진다.
글 | 승주연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 러시아어 석사, 뿌쉬낀하우스 강사와 한러번역가로 활동 중. 공지영 <봉순언니>, 김애란 <두근두근 내인생>, 김영하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등 해외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