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동엽
[아츠앤컬쳐] 신동엽(1930.6~1969.4)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6.25전쟁, 4.19, 5.16 등 격변의 근세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한 시인이다.
그는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전쟁 승리를 위한 노력봉사에 동원되는 바람에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으나 틈만 나면 꾸준히 독서로 실력을 쌓았다. 그런 그가 6.25 때 국민방위군에 소집되어 일제 치하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을 고생을 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는 너무나 기가 막힌다. 당시 전쟁 중에 국민방위군에게 지급할 보급품을 횡령 착복한 못되먹은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때문에 수만 명이 굶어죽고 얼어죽었으며 80%가 폐인이 되었다고 한다.
대표작으로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장편서사시 <금강>에서는 역사적, 민족적인 참여 정신이 잘 드러나있으며, 4.19를 직접 경험한 그가 내놓은 시 <싱싱한 동자를 위하여>도 짓밟히는 속에서도 희망을 간절히 노래한다.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나라는 단편적이나마 <산문시1>에서 엿볼 수 있다.
<산문시1>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 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 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탱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 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 소리 춤 사색(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톳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릿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산에 언덕에>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崬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싱싱한 瞳子를 위하여>
도시의 밤은 나리고
벌판과 마을에
피어나는 꽃불
1960년대의 의지(意志) 앞에 눈은 나리고
인적 없는 토막(土幕)
강이 흐른다.
맨발로 디디고
대지(大地)에 나서라
하품과 질식 탐욕(貪慾)과 횡포
비둘기는 동해(東海) 높이 은가루 흩고
고요한 새벽 구릉(丘陵) 이룬 처녀지(處女地)에
쟁기를 차비하라
문명(文明) 높은 어둠 위에 눈은 나리고
쫓기는 짐승
매어달린 세대
얼음 뚫고 새 흙 깊이 씨 묻어두자
새봄 오면 강산마다 피어날
칠흑 싱싱한 눈동자를 위하여.
글 전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