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海印寺
[아츠앤컬쳐] 해인사는 대장경을 소장한 법보종찰이다. 해인사 창건에 관하여 <가야산해인사고적>을 보면, ‘신라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으로 고생할 때,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왕후의 병을 낫게 하매, 애장왕이 고마움의 표시로 802년에 해인사를 짓게 했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친 최치원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서안주원벽기>에서 불심이 강했던 애장왕의 할머니인 성목왕 태후가 해인사 창건의 대시주였을 것이라고 했다. <균여전>에는 ‘희랑대사가 신라말 왕건이 견훤을 물리치도록 도운 대가로 930년경 해인사를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살아계실 때 부처님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해 놓지 않았던 제자들은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에야 다리수 잎에 글자를 새겨 최초의 불교경전인 패엽경을 만들었다. 이후 인도불교의 포교활동으로 불경이 한자로 번역되어 우리나라에까지 전파되고 대장경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고려 고종 19년(1232)에 살리타이의 몽골 2차 침입으로 초조대장경과 의천의 고려속장경이 소실되자, 항몽투쟁의 일환으로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년까지 16년간 대장경을 다시 제조하였다.
조선 태조는 왜구들의 잦은 노략질로 강화에 보관된 고려대장경판이 위험해지자 위치상 외적의 침입이 어려운 해인사에 봉안하여 이때부터 법보종찰이 되었다.
경판 제조 과정은 정성어린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 우리나라 남부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인 거제목을 바닷물에 3년간 담갔다가 꺼내어 판자로 짜서 다시 소금물에 삶아 말리고 대패질한 후, 구양순 필체의 판하본을 돋을새김하고 옻칠하여 네 귀를 동판으로 장식하면 한 장의 경판이 완성되는데 해인사에는 모두 81,350매의 경판이 있다.
추사 김정희는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모두 동일한 글자체를 보고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 내려와 쓴 것 같다”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큰 자랑인 팔만대장경은 정확도와 완성도가 높은 완벽한 대장경으로 1995년에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경판이 77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온전한 것은 전통과학의 상징인 대장경판전에 보관하기 때문이다. 대장경판전은 내부 바닥에 황토, 강석회, 숯, 소금이 차례로 다져져 있어 경판 보존에 최적의 온도와 습도가 자연히 조절되며, 격자 모양과 위아래 크기가 다른 창문의 과학적 통풍방식, 인경작업의 편의성 등이 완벽히 조정된 보물창고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대에는 일본 국사 일행이 와서 단식투쟁하며 대장경판 하사를 요구하다가 고작 6일만에 어설프게 포기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에도 왜군 때문에 대장경의 운명이 풍전등화였으나, 홍의장군 곽재우를 위시한 의병과 해인사 승병들이 목숨을 걸고 이를 지켜낸 바 있다.
6.25 전쟁 시에도 또 다시 위기를 맞아, 미군이 인민군 소탕작전 명목으로 해인사 폭격을 명령했으나, 당시 김영환 편대장이 그곳이 해인사임을 확인하고 대신 능선 너머 뒷산을 폭격하며 대장경을 지켜냈다고 한다.
해인사의 암자 중 홍제암은 광해군이 사명당에게 내린 익호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임진왜란의 의승장인 청허당(사명당 스승인 서산대사), 기허당, 사명당을 비롯 16 고승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사명대사는 홍제암에서 입적하여 부도와 함께 허균의 비문으로 된 석장비가 있다. 비문을 보면,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에 승병을 조직하여 큰 활약을 했으며 부산 담판 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우리나라에 보물이 있냐고 묻자 "네 머리가 곧 우리의 보물"이라고 당차게 답한 일화가 전한다.
또한, 왜란 후에 사절단으로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평화회담을 하고 끌려갔던 백성 중 1,600명을 되찾아온 내용도 새겨져 있다.
석장비는 일제강점기에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일본이 네 조각으로 파괴하였으나 광복 후 다시 이어 붙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