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적사 妙寂寺

2023-01-01     아츠앤컬쳐
묘적사, 사진 남양주시청

 

[아츠앤컬쳐] 묘적사는 남양주 묘적산 남쪽에 아늑하고 경관이 아름다운 계곡에 자리한다. 옛날에 과거시험을 보기 위하여 강원도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 중에 묘적산 길도 널리 알려진 길이었다고 한다. 이 길은 교통의 요지로 지금도 위아래로 철도와 고속도로가 확장되어 달린다.

묘적사 계곡, 사진 남양주시청

사찰은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가 무술 도량으로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 초기까지 거의 폐허 상태로 방치되던 것을 세종 때 학열스님이 180여 칸을 지으며 중창하여 남북 군영을 세우고 무과 시험장으로 쓰기 시작하였고, ‘세종실록’이나 ‘연산국일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기록에도 등장한다.

묘적사, 사진 남양주시청

묘적사는 이처럼 국난에 나라를 지키러 대비하던 사찰로서, 승병 양성 도량이었다. 절에서 내려오는 구전에 따르면, 본래 국왕 직속의 비밀기구로서 왕실 산하 비밀요원을 선발하여 승려로 출가시킨 뒤 고도의 군사훈련과 정예 교육을 받도록 했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다른 사찰에 비해 유독 비밀스럽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사찰이다.

묘적사 계곡, 사진 남양주시청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이 승군을 훈련하는 훈련도감으로 사용하였으나, 왜군들의 집중 공격을 수차례 받으며 결국 폐허가 되고 만다. 병자호란 후에는 승려들의 무과시험 훈련장으로 쓰였다. 지금도 절의 동쪽에 활터로 추정되는 공터가 남아 있고 간혹 화살촉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 대웅전 바로 옆에 민간인의 묘가 들어앉는 등 또 다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복연 수군통제사, 사진 남양주역사박물관

이후 거의 사라져가는 묘적사를 보살피고 명맥을 유지한 인물에 이복연이 있다. 이복연의 집안은 원래 대대로 문인의 길을 걸어 왔었으나, 효심이 지극한 그는 어머니를 위해 붓을 놓고 무과로 전향하였다. 이복연은 무과에 합격하여 나라를 위한 충성심으로 훈련대장과 삼도수군통제사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묘적산 위쪽에 어머니의 무덤을 쓰고 훗날 유언으로 자신도 어머니 옆에 묻어달라 하여 지금도 어머니 묘 맞은편에 자리한다고 하니, 참으로 충과 효의 본이 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묘적사 팔각다층석탑, 사진 문화재청

묘적사의 유일한 문화재인 대웅전 앞 팔각구층석탑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발걸음을 잡아 끈다. 탑을 통해 많은 전각과 스님들이 분주히 오갔을 과거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탑은 조선 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3층과 4층 사이의 체감율이 부자연스러워 본래 탑은 9층보다 높았을 것으로 보이며, 고려 후기에 건립된 오대산 월정사의 팔각구층석탑, 조선중기에 건립된 수종사의 팔각오층석탑과 비슷한 양식을 띤다. 원나라 영향을 받은 고려 후기 팔각석탑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규모가 작아지고 장식적으로 변한 조선 초기 석탑의 형태를 잘 드러내고 있다.

묘적사, 사진 남양주시청

묘적사의 명물 중에는 보리수가 있다. 하지만 보리수는 우리나라 토양과 기후에 맞지 않아 엄밀히 말하면 이 나무는 찰피나무 또는 염주나무라고 불러야 맞다고 한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옛날 어떤 이가 이 나무 열매로 염주를 만들어 부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었는데 그 소원이 성취되었다는 소문이 크게 퍼졌다. 그때부터 그 영험함을 듣고 이 나무 열매로 만든 염주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 작지만 귀하고 신묘한 능력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묘적사, 사진 남양주시청

절에 남아 있는 기록 중 김교헌의 '묘적사산신각창건기'에 따르면 묘적사는 1895년(고종 32)에 규오법사가 산신각을 중건했다고 한다. 그 뒤 실화로 전소된 것을 1971년 자신스님이 대웅전과 요사를 중건했다. 쇠퇴하거나 명맥만 겨우 유지해오던 사찰은 역사가 거의 잊혀져 비밀스러운 절이 되었지만, 소박한 규모를 떠나서 나라를 위하여 분연히 일어났던 사명당과 승병들로 인해 꼭 기억해야할 역사 속의 사찰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