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 龍珠寺

2023-08-01     아츠앤컬쳐
사도세자(조선 장조) 영정 (서울 은평구 구파발 사신당에 봉안된 사도세자 초상화)

 

[아츠앤컬쳐] 화성시 화산 용주사는 원래 854년(문성왕 16년)에 창건한 갈양사가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후 1790년(정조 14년)에 사도세자의 능사로 재건한 사찰이다.

사도세자는 1735년 영조의 늦둥이로 태어나 한 살에 벌써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무척 영특하였다고 하며, 지나친 기대로 가혹하고 엄격한 경연 일정에 내몰리어 점차 정신적 부담이 병이 되었다. 영조가 15세의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을 때는, 경험부족과 당파싸움으로 압박을 당하며 병세가 갈수록 악화되었다. 게다가 영조가 세자를 보호하라고 보낸 김상로가 오히려 세자를 모함하는 등 고립되었다. 결국 옷을 두려워하는 의대증이 발병하고 광증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다.

융릉 

가혹한 압박 속에서 어리고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결국 끔찍한 임오화변이 발생하게 된다. 이 참사는 세자의 관서 유람을 두고 세자가 관서에서 역모를 모의했다는 나경언의 고변으로 시작한다. 갈수록 태산이 되어 세자의 온갖 비행에 100명가량 살인까지 했음을 알게 된 영조는 대로하여 세자에게 자진을 강요한다. 결국 사도세자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뒤주에 갇혀 8일만에 죽고 만다.

건릉

용주사는 불교가 억압받던 시대에 정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세운 능사라는 점에 의미가 크다. 정조는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이며, 꽃이 피어나는 형상의 화산 아래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현륭원은 추존 후에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고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며, 두 능을 합하여 융건릉이라 부른다.

홍살문과 삼문

이 능찰의 낙성식날 저녁,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절 이름을 용주사라 지었다고 한다. 입구에는 여느 사찰과 달리 홍살문과 문이 세 개인 삼문이 있는데, 이는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재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천보루이자 보제루

경내로 들어서면 천보루 아래로 궁궐건축에 사용되는 높다란 석조기둥이 있어 사찰과 궁궐을 합한 형상이다. 좌우로 7칸씩의 회랑에 요사채로 쓰이는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이 연결되어 있다.

대웅보전

대웅전은 18세기 불교건축물의 전형적인 양식에 더하여, 장대석 기단과 이중초석으로 궁궐 건축의 특성을 가미하여 격조 높게 지었다.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과 후불탱화

내전의 목조삼세불좌상은 전라도와 강원도에서 활약하는 조각 스님 세 분이 조성하여 각기 지역적 특성이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다. 근엄한 표정의 사각형 얼굴에 간결한 옷자락, 높은 지혜를 상징하는 머리의 육계와 상투 매듭 구슬 등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보인다. 닫집 또한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용과 극락조가 불단을 보호하며 불국토의 세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천불전

대웅전 삼세불 뒤로는 정조로부터 최고의 총애를 받고 당시 연풍현감으로 있던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는 후불탱화가 있다. 기존의 탱화와 달리 인물 표현에 서양화의 음영법을 구사하였는데, 이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경기파의 작품에 보이는 표현수법이라고 하며, 일반적인 불화의 주조색인 적색, 녹색보다 엷은 청색과 갈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간의 김홍도 화풍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한다.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 사진 문화재청

그러나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에 후불탱화의 제작자로 ‘대웅보전보탑후불탱삼세여래체탱 화원 연풍현감김홍도’라고 적혀 있어 기록을 볼 때 단원이 주관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오층석탑

정조를 기쁘게 한 일화 하나를 전한다.

정조는 수시로 능행을 하였으며 미복으로 암행도 많이 했다. 하루는 암행 중에 능 가까이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과연 일반 백성들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능에 대해 물으니, 농부는 억울하게 죽은 뒤주대왕의 애기능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정치적으로 희생되어 뒤주 속에서 죽었고, 왕이 되지 못하고 일찍 죽어서 애기능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하였다.

정조는 농부의 말에 큰 위안을 얻고 고마운 마음이 가득했다. 정조가 농부에게 글을 아느냐고 물으니 과거시험에 번번이 낙방하여 이제는 완전히 포기했다고 하자, 정조는 농부에게 과거를 꼭 다시 보라고 강권하였다. 곧 이어 특별 과거시험이 열렸고, 농부는 약속대로 다시 한번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농부가 시제를 받아보니, 능에서 만난 선비와의 대화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농부는 술술 써내려갔다. 당연히 합격한 농부가 임금을 배알하는 중에 임금이 바로 그때 만난 선비임을 알고 성은이 망극하였다고 한다.

풍수에 따라 융릉 아래 만든 연못 곤신지

 

글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