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화려한 힌두교 섬, 발리에 매료되다
[아츠앤컬쳐] 인도네시아는 약 17,500개의 섬이 한 나라를 이룬다. 말이 쉽지, 동서로 5,120km, 남북으로 1,760km에 걸쳐 퍼져 있는 수많은 섬들을 하나의 정부가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섬으로만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의 특징은 무한한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교류가 적을 수밖에 없기에, 각 섬은 고유한 개성을 보존하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행정적으로는 하나의 국가로 묶여 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는 '다양성 속의 통일(Bhinneka Tunggal Ika)'이라는 국가 운영 정책을 통해 이러한 다양성을 유지하며 통일된 문화를 지향해왔다.
종교, 다양성 속의 통일을 유지하는 힘
이 국정 철학을 유지하는 데에는 종교의 역할이 크다.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며, 2050년이 되면 세계 4위의 GDP를 차지하는 경제대국으로 성장이 예상되는 인도네시아가 그제나 지금이나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종교 의식을 존중하고 지켜나가는 모습을 보면, 종교와 관련된 의례 및 문화, 예술의 장려가 사실상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민등록증에 종교를 표기하는 나라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교, 개신교, 가톨릭교, 힌두교, 불교, 그리고 유교를 정식 종교로 인정하고 있다. 주민등록증에 종교를 기재하는 것이 의무로 되어 있어, 모든 국민은 이 6개 종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87%는 무슬림으로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한다. 나머지 종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기독교 7%, 힌두교 1.7%, 불교와 유교가 0.7% 등이다. 특히 발리와 자바는 서로 다른 종교적 배경이 지역 예술과 문화에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화려한 발리, 절제된 자바
발리는 인구의 83%가 힌두교를 믿는 힌두교 섬인 반면, 비행기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롬복, 숨바와, 반둥, 자바 등의 지역은 무슬림이 지배적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섬들이지만, 종교의 차이로 의식주 문화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발리는 힌두교를 중심으로 한 화려하고 상징적인 예술과 문화를 형성했으며, 자바는 무슬림의 영향으로 실용적이고 절제된 문화 특성을 나타낸다.
발리가 힌두교 섬이 된 이유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초까지 자바섬에서 이슬람교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해상왕국이자 힌두교 문화와 제례 의식이 깊이 뿌리내려 있던 마자파힛(Majapahit) 왕조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된다. 이로 인해 힌두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자바섬을 떠나 발리로 도망쳤다. 박해를 피해 이주한 이들의 신분이 중요한데, 이들은 대부분 왕족, 귀족, 예술가, 장인들이었다. 힌두교 의례를 숭상하는 것이 정체성이자 존재의 이유였던 이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힌두교 문화와 예술을 새로운 터전에 이식시켰다. 자바에서 건너온 힌두교는 발리의 토착 문화, 종교와 융합되었고, 이 과정에서 발리의 독특한 예술적 전통이 형성되었다. 특히, 힌두교 의식과 관련된 음악, 무용, 미술, 건축 등이 크게 발전했다. 발리의 의례를 연구해온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Geertz)는 그의 저서 『극장국가 느가라』에서 발리를 '극장국가(Theatre State)'라고 지칭했는데, 발리 사회는 종교적 의식과 제례가 일종의 국가 운영 방식으로 기능하며, 이러한 의식들이 공동체의 결속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다.
종교가 빚어낸 예술과 일상
힌두교는 다신교로서, 다양한 신화와 상징, 복잡한 종교 의식을 통해 풍부한 예술적 영감을 제공해 왔다. 이러한 요소를 반영해 발리의 예술은 더욱 화려하고 정교한 디자인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는 발리인의 일상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1. 예술과 건축
발리에는 2만 개 이상의 사원이 있는데, 이토록 사원이 많은 이유는 어느 정도 명망이 있는 가문이라면 집안에도 별도로 사원을 세우기 때문이다. 발리의 전통 가옥의 특징 중 하나는 건물마다 층을 달리해 기능과 지위를 구분하고, 집안에 사원을 설치해 일상과 종교를 분리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문화권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공간중 하나는 ‘망자를 위한 침대’다. 집안의 어른이 사망하면 시체를 바로 매장하지 않고 집안에서 몇 달 동안 함께 생활하며 장례를 오래 치른 후 화장하는 풍습을 ‘응아벤(Ngaben)’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망한 사람의 영혼을 해방시키고 다음 생으로의 여행을 돕는 중요한 힌두교 의식이다. 장례를 비롯한 모든 종교적 기능이 집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발리 전통 가옥은 일상을 사는 공간이자 사원이다.
반면, 자바의 전통 가옥은 무슬림의 영향으로 현세보다 내세를 중시하여, 간결하고 검소한 구조와 디자인을 특징으로 한다. 자바의 장례 문화 역시 시신을 신속히 매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간결한 의식을 통해 이슬람의 신념을 반영한다. 이슬람의 내세관은 사후 세계에서의 보상을 강조하며, 현세의 행위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2. 의상과 문화
발리 전통의상인 끄바야(Kebaya)는 원래 자바에서 유래된 의상으로, 15세기경 이슬람의 확산과 함께 자바에서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자바의 끄바야는 이슬람 문화의 영향으로 보수적이고 간결한 디자인을 특징으로 하며, 종교적 규범을 반영한다. 반면, 발리에서는 16세기 이후 자바에서 이주한 힌두교도들의 영향으로 화려하고 상징적인 디자인 요소가 끄바야에 포함되었다. 발리 끄바야는 얇고 가벼운 재질로 제작되어 정교한 자수와 레이스로 장식되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발리 끄바야는 힌두교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하얀색, 노란색, 빨간색, 녹색 등 색상을 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하얀색은 순수함과 신성함을, 빨간색은 용기와 힘을 상징한다. 또한, 발리 끄바야는 시스루 소재와 몸에 밀착된 디자인을 통해 여성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발리 힌두교의 여신 숭배와 깊은 관련이 있다.
3. 음식과 일상 생활
의식주 중 종교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요소는 ‘금기’가 있는 음식 문화일 것이다. 발리에서는 소고기를 비롯한 육류 소비를 자제하고 해산물과 채소를 중심으로 한 요리가 발달했다. 발리의 전통 음식인 ‘로왁(Lawer)’은 다양한 향신료와 채소를 조합해 만든 요리로, 힌두교 의식에서 신에게 바치는 공물로도 사용된다. 반면, 자바의 음식 문화는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돼지고기를 절대적으로 금기시하며, 대신 닭고기, 소고기, 염소고기 등을 주요 단백질 원료로 사용한다. 자바 음식은 발리 음식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단맛이 강하며, 풍부한 향신료와 코코넛 밀크를 사용하는 조리법이 일반적이다. 자바의 대표적인 음식인 ‘구덱(Gudeg)’은 빵나무 열매(Jackfruit)를 코코넛 밀크와 여러 향신료로 장시간 끓여 만든 달콤한 요리로, 주로 닭고기와 함께 먹는다. 발리에 비해 자바에서는 육류 소비가 자유롭지만 이슬람의 할랄(Halal) 원칙을 준수해야한다. 고기 대신 발효된 두부인 '템페(Tempeh)'나 '토푸(Tofu)'와 같은 재료도 자주 사용한다.
영성이 녹아든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축제들
이처럼 종교는 인도네시아의 국정 철학인 ‘다양성 속의 통일’을 유지하는 핵심 매개체로 작용해왔다. 중앙집권적 통치력이 지리적 분산으로 인한 통합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대신, 인도네시아는 6개의 공인된 종교를 중심으로 사회를 재편성하고, 종교적 공동체들이 각자의 제례, 의식, 생활 방식을 통해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적극 장려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정체성의 강화는 지리적 경계 대신, 지역별로 다양성을 유지하면서도 국가 전체의 통일성을 견고히 하는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수많은 종교적 의례와 축제가 활발히 열리는 것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축제로는 발리의 갈룽안(Galungan), 자바의 란단(Lebaran), 그리고 수마트라의 타보트(Tabut) 축제가 있다. 갈룽안은 조상의 영혼이 후손들과 함께하는 날로, 발리 전역에서 힌두교 전통 의식과 화려한 장식, 전통 의상인 끄바야를 입은 주민들을 볼 수 있다. 란단은 이슬람교의 라마단이 끝나는 날을 기념하는 축제이며, 타보트 축제는 이슬람교 시아파의 종교 행사로, 수마트라의 전통 음악과 춤, 퍼레이드를 통해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글·사진 | 박재아
박재아 섬큐레이터는 지난 20년간 인도네시아, 태평양, 모리셔스 등 섬나라 및 지역의 정부를 대표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지속가능한 관광을 진흥하는 지사장으로 활발히 활동해왔다. 이화여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국제지역학 석사를 취득했으며, 현재 서울대 환경대학원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또한, 조선대학교 외래교수와 <Arts & Culture> 국제교류이사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