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백야 오페라 감상기
[아츠앤컬쳐] 2년에 한 번 가족과 같은 M컬쳐스 회원들과 함께하는 오페라 여행. 2019년의 여름 여행은 일찌감치 북유럽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처음에는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중심으로 계획을 세우려고 답사여행을 가봤으나 실질적인 휴가 기간인 7월에는 아무런 공연 정보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러시아의 문화수도 마린스키 오페라 극장이 있는 세인트피터스버그와 핀란드의 사본린나에서 올라가는 세계 최고 수준의 오페라 페스티벌에 좌표를 찍고 여행 10개월 전 비행기 표와 공연 좌석 티켓예매에 들어갔다.
마린스키에서는 이국적인 인도를 배경으로 제작된 발레 <라 바야데레>, 오페라 <토스카>와 <잔니스키키> 총 세편을 제1극장과 제2극장 모두에서 관람했다.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암표상들이 판치는 마린스키 극장의 여름 페스티벌과 암표상은 없지만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사본린나 오페라 페스티벌은 티켓확보에 있어서 종종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예매를 마쳤다. 그것도 운이 좋아서 1번부터 3번열 중앙을 차지해버렸다.
<라 바야데레> 공연은 마린스키 수석 단원인 발레리노 김기민이 주인공으로 출연해 관객들의 엄청난 박수와 찬사를 받는 모습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니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움을 느끼기에 충분한 공연이었다. 여행에 동반한 김인희 서울발레시어터 단장의 설명으로 이해하기 쉬웠으며 발레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백조의 호수> 같은 전통적 발레와는 전혀 다른 역동적 느낌의 공연이었다.
두 번째 공연은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했던 ‘마랭고 전투(1800)’를 시대 배경으로 한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이번 프로덕션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악당 스카르피아가 나치의 책임 장교로 등장하는 식의 연출법을 사용했다.
마지막 공연인 푸치니의 <잔니스키키>는 출연진이 영화 <아담스 패밀리>를 떠오르게 하는 고딕풍 의상을 입고 으스스하고 괴기한 분위기 속에 공연을 진행했다. <잔니스키키>가 공연된 마린스키 제1극장은 러시아어 자막만 제공했지만 한 시간이라는 짧은 공연 시간과 사전 오페라 해설을 통해 코믹 오페라의 느낌을 만끽하는 저녁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버스를 타고 통과가 그렇게 힘들다는 러시아 핀란드 국경에서 예상대로 두 시간 가량을 지체하고 공연 장소로 직행하는 코스로 350km를 달려 힘들게 만난 공연은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영국 연출가 David McVicar의 작품이라는 정보 하나만으로 무작정 예매는 했지만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사실 별 기대 없이 빨리 오페라를 보고 호텔로 향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시작된 <리골레토>. 남성 합창단과 뒤섞인 수많은 남녀 연기자들이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키는 광경 속에 보여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오프닝은 시차에 지쳐있던 우리 여행단의 모든 감각을 한순간에 깨웠다. 그 순간 이후 잠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고상한 인간들의 이면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상상해 본 적은 있으나 대한민국 공연장에서는 표현하기 힘든 정말 송곳 같은 연출이었다. 원작자 빅토르위고가 비꼬고 싶었던 당대의 부패한 저 윗사람들의 모습을 연출가는 한층 더 과장되게 그렸다고 본다.
그러나 날카로운 풍자와는 별개로 예정된 이야기 그대로 부도덕한 인간은 너무나 편안하게 살아남고 인생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 악행을 돕던 오페라의 주인공 리골레토는 비극의 끝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괴롭히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던 원망과 저주가 자신이 아닌 딸에게로 향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막을 수 없었다.
관객들은 감정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워했고 만토바 공작을 미워했고 아버지를 원망했으며 죽어가는 딸의 모습을 보며 같이 눈물 흘렸다. 성악가들은 노래뿐 아니라 마치 자신이 현재 그 일을 겪고 있는 것처럼 연기했고 무대를 옮기는 크루들마저도 의상을 입고 연기하면서 예술적으로 무대를 이동시켰다.
공연이 끝난 후 박수받는 자리에서도 주역 배우들은 공연의 성공을 기뻐하는 웃음을 흘리지 않았다. 그 시골까지 찾아온 2,500명가량의 관객들 중 동양인은 우리뿐이었지만 유일하게 기립박수를 치는 우리를 향해 주인공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박수를 보냈다. 아름다운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초저녁 북반구 고위도 지방의 여름 백야를 만끽하면서 성과 땅을 잇는 배다리를 건넜다.
일반 극장과는 달리 중세에 만들어진 Onlavinlinna Castle(온라빈린나 성)의 중정의 천정을 천막으로 막고 무대와 관객석을 페스티벌 기간에만 설치한 이 극장은 성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울림과 성악가의 몸에서 직접 나오는 울림이 섞여 개인적으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독특한 울림을 들려주는 장소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울림이었고 맨 앞에 앉아있던 관객의 입장에서도 연기자의 표정과 소리를 모두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공연장이었다.
언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남의 말만 듣고 버킷 리스트의 내용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공연을 찾아가는 능동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잊고 있던 열정을 되살리는지, 이번 여행을 통해 한없이 스케줄에 치이며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던 인생의 시기에 좋은 전환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헬싱키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글 | 신금호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www.mcultur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