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벡의 젊은 바흐와 헨델

2025-05-01     아츠앤컬쳐
운하에서 본 뤼벡 시가지. 성모 마리아 교회의 쌍둥이 첨탑이 보인다.

 

[아츠앤컬쳐] 북부 독일 함부르크에서 북동쪽으로 약 60킬로미터에 위치한 뤼벡은 한때 서유럽과 스칸디나비아 및 러시아를 중계하던 한자(Hansa) 동맹의 중심도시였다. 그 시대를 증언하는 뤼벡 시가지 입구의 홀슈텐 대문과 시가지의 지붕선을 뚫고 나온 성모 마리아 교회의 쌍둥이 첨탑은 이 도시를 찾는 여행자들의 눈길을 단숨에 끌어들인다.

서양음악사에서 바흐와 헨델은 이 교회의 쌍둥이 첨탑처럼 우뚝 솟은 대음악가이다. 이 두 대가는 약속이나 한 듯 1685년 같은 해에 한 달 차이로 태어났고 출생지도 서로 그리 멀지 않은 아아제나흐와 할레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평생 서로 만나본 적이 없다. 헨델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후 영국 런던에 정착하여 크게 유명세를 누린 반면, 바흐는 독일 북부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 바흐가 가장 북쪽으로 간 곳이 바로 뤼벡인데, 성모 마리아 성당은 이 두 대가의 궤적이 서로 겹치는 곳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성모 마리아 교회는 예로부터 오르간으로 유명하다. 1668년, 이 교회의 오르간 주자 자리에 덴마크의 헬싱외어에서 건너온 31세의 젊은 대가 북스테후데(D. Buxtehude)가 임명되었다. 당시 이 교회는 북부 독일 프로테스탄트 음악의 요람이었고 이곳 오르간 주자 자리는 당시 음악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오르간 주자 자리를 맡으려면 전임자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북스테후데는 전임자의 딸 중에서 미모가 가장 뛰어난 막내딸과 1668년에 결혼하고 오르간 주자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니 다른 음악가들이 몹시 부러워하는 행운아였던 셈이다.

북스테후데가 작곡한 오르간 음악은 극적이며 환상적이었고, 그의 오르간 연주 실력은 신기에 가까웠기 때문에 모든 독일 음악가들이 꼭 한번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 했다. 북스테후데는 전임자가 1646년부터 이 교회에서 목요일마다 개최하던 ‘저녁 음악회’(Abendmusiken)를 크리스마스 이전 다섯 번째 일요일 오후로 바꾸고, 1673년부터는 대규모 행사로 확대했다. 이 음악회는 워낙 유명하여 이를 한번 보려고 독일 각지에서 음악가들이 몰려왔는데 그중에는 20세의 청년 바흐도 있었다.

성모 마리아 교회

시골도시 아른슈타트에서 오르간 주자로 봉직하던 바흐는 1705년 10월, 4주간의 휴가를 얻어 약 400킬로미터나 되는 머나먼 길을 두 발로 걸어서 왔던 것이다.

바흐는 이 교회에서 북스테후데의 완벽한 연주와 장려한 음악을 깊게 맛보았으며 이 교회의 오르간 주자 자리를 꿈꾸었다. 또 북스테후데는 그의 실력을 알아보고는 그에게 후임 오르간 주자 자리를 제의했다. 단, 관례에 따라 북스테후데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북스테후데의 딸은 나이도 바흐보다 10살 더 많은 데다가 당시 남자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정도로 매력이 없었다는 것. 게다가 바흐는 사촌 여동생 바르바라와 이미 사랑을 나누고 있던 상태였다. 어쨌든 바흐는 북스테후데의 음악에 빠져 무단결근도 아랑곳하지 않고 4주가 아니라 자그마치 4개월이나 뤼벡에서 체류한 다음에야 아른슈타트로 돌아갔다.

한편, 헨델도 성모 마리아 교회를 찾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바흐와 헨델은 서로 만날 운명이 아니었다. 당시 함부르크에서 활동하던 헨델은 북스테후데의 음악회를 보려고 왔는데 바흐가 오기 1년 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헨델도 북스테후데의 후임자가 되기를 은근히 희망했다. 하지만 그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계약서를 읽고는 기겁하여 줄행랑치고 말았던 것이다.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cultureb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