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해로 울려 퍼지는 합창
[아츠앤컬쳐] 지구상에서 어느 나라 사람들이 노래를 가장 많이 부를까? 이 질문에 대해 확실하게 답할 수는 없겠지만 북유럽의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는 국가 차원의 대규모 ‘노래잔치’가 열릴 정도로 노래에 대한 열기가 매우 뜨겁다. 오랜 세월 동안 러시아 제국에 이어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발트 3국 사람들은 그들 각자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그 중심에 바로 ‘노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래’는 독창보다는 합창이다. 합창은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데에 크게 도움을 준다.
발트 3국 중에서 라트비아(Latvia)의 경우를 보자. 국토는 남한의 65% 정도, 인구는 2백만 명도 되지 않는 작은 나라이지만 라트비아어는 리투아니아어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지역에 여러 발트족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경이고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3세기 초에 이 지역으로 진출해 온 독일 사람들이 리가(Riga)를 세운 다음부터이다.
리가는 1282년에는 한자(Hansa)동맹 도시가 되어 발트해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항으로 발전했다. 그 후 16세기에 라트비아의 북부는 스웨덴령, 남부는 폴란드-리투아니아령이 되었고, 1721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917년에는 독일제국의 점령하에 있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 독립국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1940년에는 소련에, 1941년에는 나치독일에 점령되었다가 1944년에는 소련에 완전히 합병되고 말았다.
그 후 소련이 해체되면서 1990년에 전격적으로 다시 독립을 쟁취했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역사를 겪은 라트비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다음 수도 리가의 옛 모습을 복원했다. 이리하여 리가는 아주 매력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했고 1997년에 리가의 역사 지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리가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또 하나 더 있다. 다름 아닌 ‘노래와 춤의 제전’이다. 이 제전은 보통 5년마다 개최되며 주로 6월 하순부터 7월 초순까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열린다. 이 제전에서는 주로 라트비아의 문화적 유산을 대표하는 다양한 장르와 양식이 포함된 전통 음악과 합창곡 및 전통 춤이 공연되는데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국에서 모인 중창 및 합창 참가자는 보통 약 25,000명, 전통춤 공연 참가자는 약 15,000명이나 된다. 이때 엄청난 규모의 합창이 백야의 발트해로 울려 퍼지는 것이다.
대규모 합창 전통은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발트 3국에서는 민족 각성 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1869년에 에스토니아의 지식인들이 최초의 대규모 합창제를 열었는데 그들 고유의 언어로 부르는 노래는 민족 정체성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이어서 라트비아에서도 1873년에 제1회 ‘노래의 제전’이 개최되었고 1878년에는 ‘춤의 제전’이 추가되어 현재의 ‘노래와 춤의 제전’으로 발전했다. 리투아니아 또한 1924년 첫 ‘노래의 제전’을 시작으로, 농민의 삶과 신화를 품은 노래들로 나라의 영혼을 지켜왔다.
발트 3국 사람들은 소련의 지배 아래 탄압을 받으면서도 이 축제를 이어 나갔다. 그러다가 1988년 소련의 붕괴를 앞두고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는 수십만 명이 모여 소련 치하에서 금지된 자유의 노래를 부르며 발트 3국 중 가장 먼저 ‘노래하는 혁명’의 횃불을 들어 올렸다.
10년 후인 2008년, 유네스코는 라트비아뿐 아니라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의 ‘노래의 제전’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이 축제들은 단지 전통 음악의 계승이 아니라, 노래로 과거를 기억하고, ‘자유’라는 미래를 만들어낸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cultureb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