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는 차별한다
섬만 가라앉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뽑힌다
[아츠앤컬쳐]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가 물에 잠기는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 그러나 섬이 가라앉는 것은 위기의 시작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깊고 근본적인 파괴가 일어나고 있다. 수천 년간 섬과 함께 살아온 이들의 언어, 문화, 정체성, 즉 '보이지 않는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들 조차도 이 무형의 위기에 대해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좁은 문’으로 (어떻게든) 들어가라?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일부 선진국들은 이들을 위한 이주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그 규모는 제한적이고 실행은 주먹구구식이다. 호주는 2023년 투발루 국민을 대상으로 기후변화 난민 비자인 '팔레필리 연합(Falepili Union)'을 신설했다. 연간 최대 280명의 투발루 국민에게 교육, 취업, 영주권을 제공하지만, 이는 투발루 전체 인구 약 1만 1천 명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하다. 뉴질랜드는 '태평양 엑세스 카테고리(Pacific Access Category)' 제도를 통해 키리바시, 투발루, 통가, 피지 국민에게 연간 제한된 수의 영주권을 제공한다. 이 역시 추첨 기반이라 ‘쇼’에 불과하며, 불필요한 경쟁과 시기심을 유발할 뿐이다. 미국은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팔라우 등과 '자유연합협정(COFA)'을 맺고 해당 국가 국민의 자유로운 이주와 거주, 노동을 허용한다. 그러나 이 협정은 기후위기 대응보다는 안보·경제적 목적이 우선이며, 기후 난민을 포괄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는 아니다.
'구조를 기다리지말고 준비하자’
아노테 통 전 키리바시 대통령은 '존엄한 이주(Migration with Dignity)'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위기가 닥치기 전에 미리 국민을 교육하고 직업 훈련을 시켜 다른 나라에서도 전문 인력으로서 기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역량을 키우는 선제적이고 능동적인 전략이다. 이는 국민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존엄성을 지키며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옮겨갈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생존을 넘어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선진국에 살게 되어 좋겠다고?”
그러나 '존엄한 이주'의 이상과 달리 현실은 다르다. 호주나 뉴질랜드로 이주한 태평양 도서국 출신 젊은이들은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이, 낮은 학력은 이들을 안정적인 직업 시장에서 밀려 나간다. 저임금 노동에 내몰리거나 실업 상태에 빠지기 쉽다. 이는 곧 빈곤과 사회적 소외로 이어진다. 낯선 땅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일부 청년들은 마약, 알코올 남용, 폭력 범죄에 연루되기도 한다. 본국에 남은 이들의 삶 역시 어려운 상황이다. 매일같이 차오르는 바닷물과 자연재해의 위협 속에서 생활한다. 식량과 식수 부족은 일상이 되었고, 희망과 꿈이 없는 무의미한 삶의 연장선을 살아간다.
진짜 아까운건…’시간이 쌓아 올린 가치’
이주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손실은 문화 단절이다. 젊은 세대가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고유 언어와 전통지식은 설 자리를 잃는다. 언어의 소실은 단순히 의사소통 수단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언어에 담긴 고유한 세계관, 자연에 대한 깊은 지식, 공동체의 수천 년 기억이 함께 소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태평양의 섬들은 저마다 고유한 신화, 춤, 노래, 조리법, 그리고 자연과 관계 맺는 독특한 방식을 간직해왔다. 이는 인류 전체의 문화 다양성을 구성하는 자산이다. 기후위기로 잃어버리는 정말 소중한 가치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외딴 작은 섬이 아니라, 태평양 도서국이 수천 년간 축적해온 독창적 문화 유산이다.
알아야 보인다
기후위기로 인한 태평양 도서국의 이주 문제는 생존을 넘어 한 공동체의 존엄성, 문화적 정체성, 그리고 미래 세대의 권리가 걸린 복합적인 과제다. 국제사회의 지원은 단순히 사람을 옮기는 물리적 이동에 그치지 않는다. 이주민들이 새로운 사회에 통합되고, 그들의 고유문화가 보존되며, 청년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지원하는 포괄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들의 현실을 제대로 아는 것부터 시작한다. '가라앉는 섬'이라는 단편적인 이미지를 넘어, 삶의 터전과 함께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가는 사람들의 상황과 그 속에서도 존엄을 지키려는 노력을 이해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Climate change is not merely a crisis of rising sea levels and disappearing territories—it is an existential threat to the cultural identity, dignity, and future of entire communities. In the Pacific Island nations, the phenomenon of “migration with dignity” proposed by former Kiribati President Anote Tong reflects an urgent need for proactive, rights-based relocation strategies. Yet current international responses remain fragmented and inadequate, offering only narrow pathways for migration while failing to address the deeper erosion of indigenous languages, traditional knowledge systems, and community cohesion. As Pacific youth face cultural dislocation, economic marginalization, and identity loss, the global community must shift from a logistical to a moral framework—ensuring that climate-driven migration is not just about survival, but about preserving the heritage and human rights of those who are most affected.
박재아는 <태평양기후위기대응협의회> 사무처장이자 <태평양학회> 이사, 팔라우 대통령 경제·관광 직속 자문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지역학 석사를 취득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관리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피지(Fiji)·사모아(Samoa) 관광청 한국지사장, 솔로몬제도 관광청 특별자문, 태평양 관광기구(SPTO) 한국지사장, 인도네시아 관광창조경제부(MoTCE-RI) 지사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