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예술의 영혼, 추를료니스
[아츠앤컬쳐] 리투아니아(Lithuania)는 아직 많은 사람에게 낯선 나라이다. 리투아니아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북유럽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발트 3국 중 하나로, 인구는 약 290만 명이고 수도는 빌뉴스(Vilnius)이다. 리투아니아는 무엇보다도 먼저 끝없는 백사장과 숲의 나라이다. 특히 숲은 나라 전체 면적의 약 33%가 숲으로 덮여 있으며, 예로부터 숲은 리투아니아 민족 정체성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역사적으로 보면 리투아니아는 14~15세기에 동유럽 최대의 국가로 성장, 현재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폴란드 동부까지 영향력을 미쳤고 16세기에는 폴란드와 연합하여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를 건설한 적이 있다. 하지만 18세기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놓인 다음부터는 격동의 역사에 휘몰리게 되었다. 그후 러시아제국 붕괴와 함께 마침내 1918년에 독립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소련의 지배하에 놓였고 소련 붕괴와 함께 1990년에 독립을 다시 쟁취했다. 리투아니아는 현재 유럽 연합과 나토의 일원으로서 안정적인 경제 성장과 문화적 발전을 이루고 있으며 이제 동유럽 국가라기보다는 북유럽 국가로 여겨진다.
북유럽 음악가라면 먼저 민족 서사를 음악으로 표현한 핀란드의 시벨리우스(1865~1954)를 떠올리게 되는데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추를료니스(M. K. Čiurlionis 1875~1911)를 손꼽는다. 물론 그는 국제적으로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최근 들어 그의 작품은 국제적으로 점점 더 재조명되고 있다. 그는 핀란드의 거장 시벨리우스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면서 보다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음악을 남겼다. 그런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음악가일 뿐 아니라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교향시 ‘숲’과 ‘바다’ 등을 작곡하며 리투아니아의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형상화했으며, 회화에서는 음악적 요소를 도입하여 '시각적 음악'이라는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즉 음악과 미술을 융합하며 신비롭고 초월적인 세계를 창조한 독창적인 예술가였던 것이다. 그의 작품은 서유럽의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무엇보다도 리투아니아 민속과 자연이 중심이었다. 그의 회화 ‘별의 소나타’ 시리즈는 우주의 신비를 표현하며, 그의 음악은 서정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는 리투아니아가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활동한 예술가로, 그의 음악과 미술은 리투아니아 민족 정체성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리투아니아의 지정학적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존재는 단순한 예술가를 넘어 문화적·민족적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그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11년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시벨리우스처럼 1920~30년대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며, 더욱 실험적인 음악과 미술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예술적 유산은 리투아니아 독립(1918) 이후 더욱 빛을 발했다. 심지어 소련 점령기 공산주의 체제(1940~1990) 아래에서도 그의 작품은 순수 예술로 인정받으며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1990년 리투아니아가 다시 독립을 되찾은 후, 추를료니스는 국가적 상징으로 더욱 추앙받을 뿐 아니라 리투아니아 예술의 영혼으로 기억되고 있다.
2025년은 추를료니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나라에서 추를료니스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월에 추를료니스의 이름을 딴 ‘추를료니스 현악사중주단’ 음악회가 서울 명동 성당에서 열렸는데 1968년에 결성된 이 현악 사중주단은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실내악단으로 손꼽힌다.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cultureb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