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사테의 고향, 팜플로나
[아츠앤컬쳐]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주요 도시 빌바오에서 남동쪽으로 약 120킬로미터 떨어진 팜플로나(Pamplona)는 나바라(Navarra)주(州)의 수도이다. 스페인 도시의 상당수가 고대 로마 시대에 세워진 병영에서 기원하는데, 팜플로나 역시 로마 역사와 떼어놓을 수 없다.
팜플로나는 로마제국 시대 후반의 성인 산 페르민(San Fermin)을 기념하는 축제로도 유명하다. 팜플로나의 주교였던 페르민은 로마제국에서 기독교에 탄압이 가장 심하던 시기인 303년에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매년 7월 6일에서 14일까지 성대하게 열리는 산 페르민 축제 중 절정을 이루는 것은 스릴 넘치는 것은 소몰이 행사인 엔시에로(Encierro)로 헤밍웨이가 1926년에 발표한 소설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를 통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런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깃든 팜플로나에서 태어난 인물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다름 아닌 파블로 데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1908)이다. 바스크 문화, 가톨릭 전례음악, 전통 춤 리듬이 뒤섞인 이 경계 도시는 그에게 단단한 감수성을 심어주었다. 사라사테는 5세 때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8세 때 이미 공개 연주회를 열어 갈채를 받았으며, 10세 때 이미 ‘신동(神童)’으로 널리 알려져 당시 스페인 왕실은 그에게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하사했다. 그 후 12세 때 파리로 유학 가면서부터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디뎠고, 나중에 유명해지자 당시 작곡가들은 서로 다투듯 그에게 작품을 헌정했는데, 예로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생상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등은 그에게 헌정된 명곡들이다.
사라사테는 파가니니 이후에 등장한 전설적인 국제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파가니니의 ‘악마적 기교’를 잇는 듯하면서도, 그 기교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승화시킨 인물이었다. 화려하지만 결코 과장되지 않고, 정열적이지만 단 한 음도 흐트러지지 않는, 맑고 우아한 음색, 오늘날 바이올린 연주의 미학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이 스타일의 주창자였던 것이다.
그는 단지 뛰어난 연주자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작곡가로서도 유럽 음악계에 스페인의 리듬과 색채를 본격적으로 가져온 선구자였다. 그의 작품에는 나바라와 안달루시아의 춤, 집시풍 선율, 복합 리듬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그의 대표작인 <찌고이너바이젠 Zigeunerweisen>은 바이올린 레퍼토리 중 가장 사랑받는 소품으로, 불꽃같은 패시지와 슬라브·집시풍 선율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또한 <카르멘 환상곡>은 비제의 오페라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사라사테 특유의 기교적 화려함을 불어넣어 완전히 새로운 작품처럼 느껴진다.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나바라’> 또한 나바라 전통 춤곡의 활력을 완전한 콘서트용 작품으로 승화한 예다.
팜플로나 시내 중심부에서는 사라사테와 관련된 장소를 몇 군데 찾아볼 수 있는데 먼저 이 도시의 심장부인 카스티요 광장에 있는 라 페를라(La Perla) 호텔을 빼놓을 수 없다. 이 호텔은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로 1881년에 개업했다. 이 호텔은 팜플로나를 찾아온 귀빈들이 즐겨 묵는 곳으로, 헤밍웨이도 이 호텔 손님이었으며 사라사테도 매년 산 페르민 축제 때 고향을 찾아올 때 바로 이곳에서 묵었다. 카스티요 광장에 면한 이 호텔 발코니는 산 페르민 축제 기간 중 소몰이 행사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명당자리’이다. 사라사테 역시 이곳에서 소몰이 행사를 지켜보며 환호했다. 또한 그는 이 발코니에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나바라’>를 다른 연주자와 함께 즐겨 연주하기도 했다.
카스티요 광장 뒤쪽 그가 1844년 3월 10일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은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다. 그 자리에는 새로운 건물이 세워져 있는데 건물 외벽에는 그의 생가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명판만 걸려있다. 그의 생가를 대신하는 사라사테 박물관은 팜플로나에서 필수 코스이다. 이 박물관에는 그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과 유품, 또한 그가 연주하던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그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cultureb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