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죄책감의 미학, 크로아티아의 영혼 ‘크라프네’
한겨울 자그레브의 거리가 설탕 냄새로 뒤덮이는 순간, 축제는 시작된다.
[아츠앤컬쳐] 아드리아해의 찬 바람이 자그레브(Zagreb)의 붉은 지붕들을 스치고 지나갈 때, 크로아티아의 골목은 묘한 활기로 들썩이기 시작한다. 회색빛 겨울 풍경과 대조되는, 노란빛의 따스하고 달콤한 향기. 바로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국민 디저트, ‘크라프네(Krafne)’가 제철을 맞이했음을 알리는 신호다.
여행자의 눈에 크라프네는 그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탕이 묻은 잼 도넛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푹신한 황금빛 반죽 덩어리 안에는 중부 유럽을 호령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역사와 카톨릭 문화, 그리고 크로아티아인들의 낙천적인 인생관이 잼처럼 꽉 들어차 있다.
황실의 실수, 거리의 축제가 되다
이 달콤한 빵의 족보를 캐기 위해서는 시계를 거꾸로 돌려 17세기 오스트리아 빈(Wien)의 어느 소란스러운 주방으로 가야 한다. 미식가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가장 매혹적인 전설은 빈의 유명 제과사 체실리에 크라프(Cäcilie Krapf)의 이야기다.
어느 날 남편과 격한 말다툼을 벌이던 그녀는 홧김에 손에 쥐고 있던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남편에게 집어 던졌다. 다행히 남편은 고개를 숙여 피했지만, 그 반죽은 펄펄 끓고 있던 기름 솥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치이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주방 가득 고소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우연한 실수, 혹은 분노의 투척이 만들어낸 이 튀김 빵은 그녀의 성을 따 ‘크라펜(Krapfen)’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부부싸움의 산물’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식탁을 매료시켰고, 제국의 확장과 함께 국경을 넘어 크로아티아로 전해졌다. 제국의 통치는 1918년에 끝났지만, 그들이 남긴 달콤한 유산은 크로아티아 식탁의 주인이 되어 ‘크라프네’라는 이름으로 현지화되었다. 비엔나의 우아함과 크로아티아의 투박한 정이 만나 독자적인 음식 문화로 꽃피운 것이다.
파슈니크(Fašnik)의 여왕, 금기를 허락하다
크라프네가 단순한 간식을 넘어 하나의 문화적 상징으로 승격되는 시기는 바로 2월, 카니발 시즌이다. 크로아티아어로 ‘파슈니크’라 불리는 이 기간은 사순절의 금욕적인 생활이 시작되기 전, 인간의 본능을 마음껏 해방하는 시간이다.
종교적 전통이 강한 크로아티아에서 사순절 기간에는 육식과 기름진 음식을 자제해야 했다. 따라서 금식 기간이 오기 전, 집에 남아있는 설탕, 달걀, 라드(돼지기름), 버터를 모두 소비해야만 했는데, 이 모든 재료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가 바로 크라프네였다.
과거에는 라드에 튀겨낸 고열량의 크라프네가 혹독한 겨울을 버티는 생존을 위한 에너지원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축제의 아이콘이 되었다. 자그레브나 리예카의 화려한 카니발 퍼레이드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은 한 손에 으레 따뜻한 크라프네를 쥐고 있다. “크라프네 없는 카니발은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말은 크로아티아에서 결코 과장이 아니다.
완벽한 ‘하얀 띠’를 찾아서
크로아티아의 미식가들이 ‘제대로 된’ 크라프네를 판별하는 기준은 꽤 엄격하다. 잘 튀겨진 크라프네의 허리에는 선명하고 밝은 ‘하얀 띠(Bijeli prsten)’가 둘러져 있어야 한다.
이 하얀 띠는 반죽이 기름에 완전히 잠겨 눅눅해지지 않고, 공기처럼 가볍게 떠 있을 만큼 완벽하게 발효되었음을 증명하는 훈장과도 같다. 또한 기름의 온도가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는 기술적 증거이기도 하다. 미국식 도넛이 가운데 구멍을 뚫어 속까지 익히는 실용성을 택했다면, 구멍이 없는 크라프네는 그 안을 무엇으로 채울지에 대한 미학적 고민을 담고 있다.
요즘 자그레브의 트렌디한 제과점들은 피스타치오 크림, 누텔라, 바닐라 커스터드 등 화려한 필링으로 젊은 층을 유혹한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의 어르신들이 꼽는 ‘클래식’은 여전히 살구 잼을 가득 채우고 슈가 파우더를 눈처럼 뿌린 형태다. 한 입 베어 물면 바삭한 껍질 속에 숨어있던 구름 같은 속살이 씹히고, 뒤이어 새콤달콤한 살구 잼이 입안을 감싼다. 입가에 하얗게 묻은 설탕 가루를 털어내는 것조차 이 음식을 즐기는 즐거운 의식 중 하나다.
국경을 넘는 달콤한 위로
엄밀히 말해 크라프네는 크로아티아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독일의 베를리너(Berliner), 폴란드의 퐁츠키(Pączki), 슬로베니아의 크로피(Krofi) 등 이름만 다를 뿐 중부와 동유럽 전역이 공유하는 거대한 식문화 유산이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 크라프네는 단순한 빵 이상의 의미, 바로 ‘공동체’를 상징한다.
겨울 축제 기간이면 크로아티아의 어머니들은 수십 개의 크라프네를 튀겨 이웃집 문을 두드린다. 갓 튀긴 빵을 나누며 안부를 묻고, 긴 겨울의 지루함을 달콤함으로 잊는다. 그들의 정겨운 모습에서 우리는 국경과 역사를 초월한 음식의 위대한 치유력을 발견한다.
혹시 겨울의 끝자락,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다 우연히 빵집 진열대의 크라프네를 마주친다면 주저 말고 하나를 집어 들길 바란다. 당신이 베어 무는 것은 단순한 설탕 빵이 아니다. 그것은 수백 년을 이어온 제국의 역사이자, 낯선 여행자에게 건네는 크로아티아의 가장 따뜻하고 달콤한 환대일 테니 말이다.
글 ㅣ 김수정
(주)파인푸드랩 대표 | 한국식음료세계협회 회장 | 경희대학교 캠퍼스타운, 서울먹거리창업센터 멘토 12년 경력의 식품 개발 전문가, 한식진흥원 및 다수 기업/지자체 레시피 개발 및 강의 이력 chefcrystal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