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의 두 얼굴: 폭탄 밭 위의 천국
전쟁·핵실험·강대국 각축·기후위기, 그래도 '파라다이스'를 팔아야 하는 섬들
뒷마당의 수류탄
[아츠앤컬쳐] 솔로몬제도의 수도 호니아라에서는 아이들이 뒷마당에서 녹슨 수류탄을 줍는다. 장난감이 아니라 진짜 폭탄이다. 운이 좋으면 고철상에 팔아 며칠 치 식량을 마련하고, 운이 나쁘면 손가락을 잃거나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1997년 고(故)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가 앙골라 지뢰밭을 걸으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 단체, 영국의 지뢰·불발탄 제거 전문기관 헤일로 트러스트(The HALO Trust)는 현재 솔로몬제도에서도 활동 중이다. 현장 매니저 에밀리 데이비스는 말한다. "아이들은 여전히 뒷마당에서 수류탄을 찾아내고 있다." 9세 소년이 70년 전에 발사된 일본군 91식 수류탄을 손에 쥔 채 조사팀에게 다가온 일도 있었다.
1942년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전쟁의 격전이었고, 미·일 양측이 쏟아부은 수십만 발의 폭탄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 땅에 남았다. 80년이 지난 지금도 수십만 점의 불발탄이 주택·학교·채소밭 아래 묻혀 있으며, 매년 20명 이상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한다. 2011년 이후 수거·처리한 불발탄만 5만 점이 넘는데, 그중 80%가 미국산이다. 빈곤한 일부 주민은 불발탄 속 폭약을 추출하여 물고기를 잡는 '폭탄 낚시'에 쓴다. 2021년에는 교회 청년회 야외 행사 도중 지하에 매장된 미군 고폭탄이 터져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국평화연구소는, 이미 모두에게 잊힌 솔로몬 사람들에게 2차 대전의 폭탄이야말로 "서방 세계를 상기시키는 거의 유일한 존재"라고 지적했다.
히로시마 × 20년, 핵실험의 유산
전쟁의 잔해 위에 핵실험의 유산이 겹쳐졌다. 미국은 마셜제도 비키니·에네웨타크 환초에서 67회, 프랑스는 무루로아·팡가타우파 환초에서 193회의 핵실험을 감행했다. 미국이 태평양에 쏟아부은 총 폭발력은 108메가톤, 히로시마 원폭을 매일 하나씩 20년간 투하한 것과 맞먹는다. 마셜제도 일부 지역의 방사능 수치는 지금도 체르노빌보다 10배 높고,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갑상선암 발생률은 주변 태평양 원주민 대비 2~3배에 달한다. 2025년 6월 프랑스 의회는 정부에 공식 사과를 권고했으나, 구체적 보상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비키니 환초 원주민은 1946년 강제 이주된 뒤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강대국의 장기판 위 '졸'
여기에 강대국 각축이 다시 불을 붙였다. 2022년 솔로몬제도와 중국이 체결한 안보협정은 중국 군사 인력의 파견과 함선 기항을 허용하여, 남태평양에 중국 군사기지가 들어설 수 있다는 서방의 우려를 촉발했다. 미국은 솔로몬제도 대사관을 재개관하고 파푸아뉴기니 해군기지 접근권을 확보했으며, 호주는 1억 1,800만 달러 규모의 경찰 협력 사업을 발표했다. 솔로몬제도 국회의원 피터 케닐로레아 주니어는 "강대국의 관심은 있지만, 지역 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종류의 관심이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개발 지원 대신 안보 인력이 밀려오는 현실에서, 태평양 도서국은 지정학적 장기판의 '졸'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가라앉는 섬, 최후의 일격
그 위에 기후위기라는 최후의 일격이 더해진다. 물론 전쟁이나 코로나19 같은 재난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최후'라는 의미다. 태평양 도서국의 탄소배출량은 전 세계의 0.03%에도 못 미치지만, 서부 열대 태평양의 해수면 상승 속도는 세계 평균의 최대 4배이다. NASA는 투발루·키리바시·피지가 향후 30년 이내에 최소 15cm의 해수면 상승을 피할 수 없으며, 이는 온실가스 감축과 무관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라고 분석했다. 키리바시·마셜제도·투발루에서는 전체 인구가 해발 5m 이내에 거주한다. 땅이 잠기기 전에 담수가 먼저 고갈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천국을 팔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 모든 비극 한편에서 태평양 도서국은 '지상낙원'을 판다. 2019년 기준 관광업이 GDP의 약 20%를 차지하고, 팔라우는 50%에 달한다. 대규모 자원 채굴이나 제조업 기반 자체가 부재하여 경제적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관광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천국'을 파는 것이다.
태평양 관광 홍보를 멈춘 이유
2003년 피지관광청 초대 한국지사장으로 임명되어 태평양과 인연을 맺었다. 20년이 넘도록 태평양에 대한 사랑과 미안한 마음을 한 순간도 놓은 적이 없다. 태평양 전문가라 불릴 만큼 꽤 많은 글을 쓰고 강연도 했다.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태평양 도서국을 직접 방문하고, 지금도 현지와 연락이 닿는 사람은 아마 내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내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여전히 태평양 채널로 도배되어 있다. 하지만 2년 전, 관광 홍보의 최전선에서 물러났다. 소비자는 냉정하다. 더 싸고, 더 화려하고, 더 가까운 곳을 택한다. 태평양은 발리보다 싸질 수 없고, 하와이보다 화려해질 수도 없다. 가격과 편의의 경쟁판에서 이 섬들은 영원한 루저다. 더 이상 태평양의 상황을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번 가볼 가치가 있는 곳이라며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홍보대신 공부를 시작했다. 2024년, 서울대 환경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연구 주제는 여전히 '지속가능한 관광'이다. 구체적으로는 태평양을 비롯한 섬 지역의 기후위기 문제다. 기후위기는 이들이 지닌 깊은 상처를 드러낸 화두에 지나지 않는다. 기후위기라는 의제 덕분에 세계가 비로소 이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까. 전쟁·핵실험·기후위기라는 구조적 상처 위에서 관광이 현지 공동체의 회복에 실제로 기여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지, 관광 수익의 역외 유출을 줄이고 지역 경제에 실질적으로 순환시키는 모델은 어떻게 설계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은 태평양만의 것이 아니다. 발리, 타히티, 하와이, 모리셔스. 제국주의와 전쟁의 흔적에서 자유로운 여행지는 거의 없다. 상처를 덮고 '파라다이스'를 파는 대신, 참상을 직시하고 구조를 바꾸는 것. 그것이 지속가능한 관광의 출발점이다. 알아야 질문하고, 질문해야 바꿀 수 있다.
글 ㅣ 박재아는 '섬 좋아서 섬 일하는' 섬 전문가(Islandophile)로, 지난 20여 년간 남태평양에 위치한 피지, 사모아 관광청 및 21개의 태평양 도서국 및 자치령을 관할하는 태평양관광기구(SPTO), 그리고 인도네시아 관광창조경제부(MoTCE-RI) 한국지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모리셔스, 팔라우, 크로아티아 관광청의 파트너이자, 조선대학교 대외협력교수, 태평양학회 이사직 등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