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더레지 Ederlezi
역설의 찬가
[아츠앤컬쳐] 4월의 공기가 완연한 봄을 머금으면 유럽의 시간은 23일이라는 숫자에 멈춰 선다. 이날은 대륙 전체가 ‘땅을 일구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게오르기오스(Georgios)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이는 성 축일이다. 전설 속 기사 게오르기오스가 날카로운 창으로 용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했듯, 이날은 겨울이라는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의 빛을 되찾아오는 승리의 상징으로 읽힌다.
흥미로운 점은 대륙의 가장 고귀한 기사의 서사가, 역설적이게도 유럽의 가장 낮은 곳에서 떠돌던 집시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는 사실이다. 차별과 빈곤이라는 고통 속에서 유랑의 삶을 이어가야 했던 로마니(Romani) 민족들에게 기사의 서사는 종교적 의례를 넘어선 실존적인 구원으로 다가갔다. 그리하여 화려한 성당의 종소리 대신 발칸 반도의 흙먼지 속에는 ‘에더레지’라 불리는 생의 분기점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기사가 용을 베어 넘기듯 집시들은 이날 새벽 차가운 강물에 몸을 던져, 혹독한 추위와 멸시 속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쟁취할 수 있는 생존의 증거를 기억해 내었다.
이 거칠고도 아름다운 축제의 중심에는 음악감독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ć)가 빚어낸 명곡 ‘에더레지’가 흐른다. 에미르 쿠스투리차(Emir Kusturica) 감독의 영화 <집시의 시간 (Time of the Gypsies, 1988) >을 통해 강렬한 각인을 남긴 이 곡은, 가난한 집시 소년 페란(Perhan)의 유랑 생활과 타락, 비극적 운명을 다룬 영화의 서사와 긴밀하게 맞물린다. 특히 ‘에더리지 축제’ 장면에 삽입된 이 선율은 수천 개의 촛불이 일렁이는 강물 위로, 집시들의 슬픈 환희와 생존의 의지를 장엄하게 투영한다.
음악적으로 ‘에더리지’는 기묘한 이중성을 띤다. 화려한 풍경 뒤에 숨은 개인의 소외를 극대화하는 이 곡은, 가장 찬란한 순간에 깃든 깊은 슬픔의 결정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정서는 겨울이 끝났음을 알리는 집시들의 최대 명절 ‘에더레지’의 풍경과 맞물리며 더욱 선명해진다. 집안을 꽃으로 단장하고 양을 잡아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 속에서, 오히려 그 즐거움에 합류하지 못하는 이의 외로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설적 표현은 곡의 전개에도 투영되는데, 곧 도입부와 후반부가 이루는 정서적 대비와 편곡의 변화에서 체감된다. 도입부의 여성 보컬, 반나 라니에브스카(Vanna Ranievska)의 음성은 집시 음악 특유의 세밀한 미분음(microtone)을 사용하여 마치 폐부를 찌르는 듯한 통곡의 꺾임을 들려준다. 그러나 곡이 진행될수록 저변에 깔리는 리듬은 달리는 말발굽 소리처럼 역동적으로 변모하며, 금관악기의 거친 사운드와 맞물리어 슬픔을 환희로 치환한다. 이 이중적 에너지는 곧 가사에 이르러 더욱 선명해지는데, 풍성한 잔치와 비루한 현실 사이에서의 서글픈 간극이 가감 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모든 집시여, 아버지여, 그들이 양을 잡고 있네요. 모든 집시여, 어머니여, 모든 아이가 꽃을 꺾고 있어요. 하지만 가난한 나는, 멀리 떨어져 앉아 있네요. 모든 집시여, 아버지여, 에더레지 축제여.”
노래는 이처럼 화자를 통해 축제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가만히 응시한다. 이는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 한 비루한 현실을 처연한 선율에 실어 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슬픔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순간, 마음속에는 이미 다시 살아갈 작은 힘이 생겨나기도 한다. 잠잠하던 슬픔이 격정적인 환희로 변하며 끈질긴 생명력으로 승화되었듯 말이다.
에더레지의 선율은 이제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강물에 흘러보내야 할 해묵은 슬픔이 무엇인지를. 만약 박제된 평온으로 굳어진 일상이 답답하다면, 잠시 틈을 내어 발칸의 뜨거운 가락을 감상해 보길 권한다. 우리 안의 결핍을 어루만지는 것은 특별한 비법이 아니라, 슬픔조차 실어 보내는 담담한 마음, 그 끝에서 울리는 신음과 같은 노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글 | 길한나
보컬리스트
브릿찌미디어 음악감독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stradak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