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LIBU MOON
Corinne von Lebusa & Michael Conrads, JARILAGER GALLERY
[아츠앤컬쳐] 말리부는 바비 인형의 말을 지칭한다. 말리부는 은빛으로 흘러내리는 풍성한 갈기와 분홍빛 장식, 커다랗고 푸른 눈을 가지고 있고, 달콤한 향이 감도는 플라스틱 속에 응축된 수많은 아이들의 꿈이기도 하다.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라 말리부는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모험을 함께하는 동반자이자, 말없이 비밀을 털어놓는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다. 침실과 거실을 오가며 여러 세대의 어린 라이더들을 태우고 상상의 풍경 속으로 데려간다. 그곳에서의 놀이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유연하고 끝없이 확장되며 자유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올해 2월 17일, 음력 설과 함께 중국 십이지에서 말하는 ‘화마(火馬)의 해’가 시작되었다. 화마는 오래전부터 생명력과 끈기, 스스로를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가는 용기를 상징해 왔다. 이는 결단과 대담한 움직임 그리고 변화와 성장을 향한 강한 추진력이 요구되는 시기를 예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리부 문(Malibu Moon)’의 장미빛 기운 아래에서 그 의미는 조금 부드럽게 변한다. 지속하는 힘과 창의적인 재능을 이야기할 때 그 이면에 있는 장난스러움과 유머, 무언가를 흉내 내고 상상하는 데서 오는 순수한 즐거움과 같은 또 다른 요소들 역시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리부는 화마의 달콤한 분신처럼 등장한다. 다소 가볍고 장난기 어린 숨 고르기의 순간이자, 끊임없이 성취를 요구하는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자기실현을 향한 여정이 지나치게 고된 과제가 되어버리는 상황에 잠시 숨을 돌리게 하는 작은 해독제처럼 말이다.
야리라거 갤러리 서울에서 함께 선보이는 코린 폰 레부자와 미하엘 콘라즈의 작업 역시 이와 같은 결을 따라 전개된다. 두 작가는 이상화된 이미지 생산 관습과 정체성·젠더에 대한 담론 그리고 여러 정형화된 생각들을 유머와 장난기가 섞인 태도로 마주한다. 레부자의 누드나 콘라즈의 키메라들이 어떤 상징적 위치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저명한 문화사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가 제시한 개념인 ‘마법의 원(Magic Circle)’ 안일 것이다. 이는 하나의 놀이가 만들어내는 임시적인 공간으로 그 안에서는 결과에 대한 부담 없이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서로 다른 정체성을 연기해 볼 수도 있으며, 사물들을 새롭게 배열하거나 마치 사실처럼 상상해 볼 수도 있다.
두 작가의 회화들 속에서 일상의 규칙은 잠시 느슨해지고 그 자리를 환상과 욕망이 대신한다. 익숙한 요소들은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난 채 나타나고 인물과 장면들은 마치 연극 무대 위에서처럼 자유로이 움직인다. 그 순간만큼은 긴장이 풀리고, 성공을 위해 치러야 한다고 믿어 온 대가마저 잠시 잊게 된다. 미묘한 차이와 양가적인 감정, 무엇보다도 화면에 자리한 세부적인 묘사가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어떤 것도 완전히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결과는 유쾌할 만큼 열려 있다. 이미지를 해독하는 데서 보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즐거움은 그저 그 놀이에 기꺼이 동참하는 과정 속에 있다.
코린 폰 레부자(Corinne von Lebusa, b. 1978)는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는 순간에 멈춰 선 듯한 작은 장면들을 그린다. 그녀의 작업은 여성적 다정함이 지닌 다양한 결을 탐색하는 동시에 여성적 원리에 대한 내적인 성찰을 이어 간다. <Malibu>(2024)에서는 장난스러운 내밀함이 감도는 한 순간이 포착된다. 젊은 여성이 사탕빛 조명이 스며든 방 안에서 침대에 몸을 기대고 누워 바비 인형의 말을 가지고 놀이를 하고 있다. 섬세하게 묘사된 맨살과 드러난 가슴은 취약함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화면은 여성의 관능성과 주체성을 함께 드러낸다. 자신의 몸을 온전히 인식하고 원할 때 스스로의 욕망을 탐색할 수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전시에 소개되는 여러 작품 속에서 식물들이 장면을 부드럽게 감싸며 마치 무대의 소품처럼 등장한다. 이국적인 아가베와 선인장이 모습을 드러내며, 낙원과도 같은 어떤 곳을 연상시키는 풍성한 풍경을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과연 누구를 위한 낙원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레부자의 회화에서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종종 양가적인 긴장감을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매혹적일 만큼 냉혹한 순간을 드러내기도 한다. 침실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 속에서 남성은 대체로 부차적인 위치로 묘사되며 때로는 화면 속에서 반쯤 잠긴 듯하거나 축소된 존재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Sunshine Guild〉(2025)에서는 이러한 관계가 한쪽으로 기운, 애정의 장난스러운 놀이처럼 펼쳐진다.
미하엘 콘라즈(Michael Conrads, b. 1977)는 구조와 색채, 리듬에 대한 뚜렷한 감각을 바탕으로 회화에 접근한다. 그의 화면은 추상이든 구상이든 질서와 미묘한 교란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을 이룬다. 선과 격자, 원근이 드러나는 바닥과 기하학적 형태들이 겹겹이 쌓이며 정교하고도 건축적인 화면 구조를 만들어 낸다.
그의 많은 작업은 회화가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내면의 세계와 기억 그리고 집단적으로 축적된 이미지의 아카이브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을 탐색하는 것이다. 네덜란드 거장의 꽃 정물에서부터 십대의 방 벽에 붙어 있을 법한 스티커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화면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The Haunted Artist>(2025)에서는 차가운 달빛에 비추어진 작업실의 장면이 펼쳐진다. 화면의 중심에는 독수리 머리를 한 작가의 자화상이 자리하고 있고, 그 주변에는 붓꽂이로 쓰인 워홀의 캠벨 수프 캔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업실을 떠올리게 하는 매달린 전구와 같은 미술사와 상상 사이를 오가는 사물들이 흩어져 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콘라즈의 회화는 어린 시절의 연장처럼 보인다. 여기서의 모토는 ‘놀이’다. 시간은 잠시 멈춘 듯하고, 이미지들은 수많은 참조로 채워져 있으며, 사물들은 현실과 상상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상태로
머문다. <Die Burg>(2026)에 등장하는 성처럼, 그의 작업은 상상과 현실 사이의 섬세한 경계를 떠올리게 한다.
JARILAGER GALLERY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