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의 흐름으로 살아난 도시의 생명

제우스(JEVS)의 'Royal Zeptopvs 2017'를 바라보며

2026-04-01     아츠앤컬쳐
ZEVS, Royal Zeptopvs2017, Hanji and Korean traditional ink on paper Approx. 80 × 140 cm

[아츠앤컬쳐] 프랑스 출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개념미술가 제우스(ZEVS, 본명 Christophe Aguirre Schwarz on 17 November 1977)는 도시의 이미지와 자본의 기호를 해체하며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해 온 작가다. 광고 로고를 녹아내리듯 표현한 ‘리퀴데이션’ 연작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그는, 거리의 감각과 비판적 시선을 동시대 미술 안으로 끌어들여 왔다.

그의 작품 <로열 제토퍼스Royal Zeptopvs 2017>은 한지와 한국 전통 먹으로 완성되었다. 서구의 거리 문화에서 출발한 작가가 동양의 재료를 선택했다는 점은 단순한 형식적 차용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에서의 작업 경험과 문화적 인상을 바탕으로, 재료가 지닌 결, 번짐, 여백의 미학을 자기 언어로 받아들인 결과에 가깝다.

화면 속 형상은 문어를 닮아 있으나, 단순한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중심에서 뻗어 나간 여러 촉수는 먹의 농담과 번짐 속에서 살아 있는 필획으로 움직이며, 한 화면 안에 긴장과 리듬을 만든다. 서예 선의 호흡과 그래피티의 즉흥성이 함께 스며들어, 동양과 서양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여백이다. 비어 있는 듯한 공간은 형상을 더 강하게 떠오르게 하고, 먹의 움직임은 그 여백 속에서 더욱 깊은 울림을 만든다. 빠르고 강한 도시의 에너지가 한지 위에서 느리고 조용한 번짐으로 변환되는 순간, 이 작품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의 사유가 된다.

<로열 제토퍼스 2017>은 결국 문어의 형상을 빌려 완성한 한 편의 동양적 추상이다. 거리의 감각, 도시의 속도, 먹의 명상이 한 몸처럼 연결된 이 작품은, 제우스가 한국적 재료를 통해 얼마나 섬세하게 자신의 조형 세계를 확장했는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장면이다.

 

글 | 김남식
춤추는 남자이자, 안무가이며 무용학 박사(Ph,D)이다. <댄스투룹-다>의 대표, 예술행동 프로젝트 <꽃피는 몸>의 예술감독으로 사회 참여 예술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며 정신질환 환자들과 함께하는 <멘탈 아트페스티벌>의 예술감독으로 활동, <예술과 재난 프로젝트>의 움직임 교육과 무용치유를 담당하며 후진양성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