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행
[아츠앤컬쳐] 21세기를 문화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국민 대다수에게 진정한 문화예술의 향유를 위한 보편적 기회가 형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진정한 문화선진국의 수립을 위한 새로운 정책 대안으로 인식개혁과 지원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매년 많은 작가들이 미술시장으로 유입되고 있지만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는 작품을 판매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작가들의 창작 활동 위축에 더해 전반적인 미술시장의 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역량 있는 작가들의 경우에도 창작활동을 포기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과 맞물려 국민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고, 장기적인 경제 불황으로 인해 개인의 미술품 구매 욕구마저 위축되는 등 전반적으로 미술시장의 형성 자체가 뿌리째 흔들린다며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사실 소비자의 입장에서 고가의 미술작품 구매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일부 민간화랑을 중심으로 미술품 대여사업이 운영되고 있으나, 창작지원과 미술시장 활성화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미술은행이란 미술품을 구매하여 일정 규모의 컬렉션을 만들고 이를 공공기관이나 기업에 대여해주는 제도를 말한다. 영국(BTC, British Council Collection), 프랑스(Fnac, Fonds national d'art contemporain), 독일(IFA, Institut for auslandsbeziehungen), 호주(Art Bank), 캐나다(CCAB, Canada Council Art Bank) 등 많은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미술품을 구매하여 이를 ‘공공기관의 문화공간화’와 ‘국민의 문화향유권 향상’을 위해 대여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미술품을 감상할 기회를 제공하고, 작가에게는 작품 구매를 통한 창작 여건을 개선한다는 복합적인 정책 목표 아래 2005년 미술은행제도를 도입하였다.
미술은행을 다른 사업과 구분해주는 기준은 네 가지다.
첫째, 미술은행은 미술품 대여를 주된 사업으로 한다. 미술은행은 미술품 대여 이외에 전시,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으나 미술은행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대여사업이다. 미술은행의 대여사업은 민간부문의 미술품 대여시장과 업무 영역이 일부 겹친다.
둘째, 미술품이 설치되는 장소는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건물 내에 있는 사무 공간이나 공공 공간이다. 대여기관은 공공기관으로 제한될 수도 있고 기업이나 일반인에까지 확대될 수도 있으나 설치 장소는 전시 공간이 아니라 일상 공간이다.
셋째, 미술은행은 미술품을 구매하여 컬렉션을 만든다. 미술품을 구매하는 목적은 대여하기 위해서이며, 미술품을 대여받는 기관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정 규모의 컬렉션을 유지한다.
넷째, 미술은행은 공공제도다. 미술은행은 정부, 지자체, 예술위원회 등 공공기관이 미술정책의 하나로 운영하는 것이다. 미술은행에서는 유망 작가 지원, 지역 작가 지원 등 정책목표에 따라 구입 또는 대여의 범위가 제한될 수 있다.
미술은행과 미술관은 구매를 통해 컬렉션을 만든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구매의 목적이 다르다. 미술관은 대여가 목적이 아니라 자체 상설 전시나 기획 전시에 활용하는 것이 목적이다. 미술은행은 대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미술품을 구매할 때 대여 가능성을 고려한다. 미술은행의 미술품은 설치 장소가 로비, 복도, 회의실, 집무실 등 일상 공간이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에 설치하여 관리하기 적합한지를 고려한다. 미술관에서도 대여를 한다. 하지만 대여는 미술관이나 미술관 수준의 보존 환경을 구비한 전문기관에 한정된다.
간혹 미술은행이 전시 공간에서의 기획전시를 위해 미술품을 대여하는 경우도 있으나 미술은행의 주 기능은 일상공간의 환경 개선이라는 점에서 미술관의 대여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미술품 대여 계약은 대여자(Lender)가 차용인(Borrower)에 대하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미술품을 일정기간 임대할 것을 약정하고, 이에 대하여 차용인은 미술품의 임대에 따른 대여료를 차임에 준하여 당해 대여자에게 지급할 것을 약정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이다. 우리 민법은 물건의 이용을 목적으로 하는 계약으로 임대차, 사용대차, 소비 대차 등을 규정하고 있는데, 미술품 대여 계약은 유상 계약인 경우 임대차계약, 무상 계약인 경우 사용대차계약의 성질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계약 성질에 따라 민법에서 정한 관련 규정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민법 규정이 적용되는 경우는 당사자 간에 계약이 없는 경우에 한한다. 즉, 대여자와 차용인 간에 미술품 대여 계약이 있는 경우에는 (계약 내용이 우리 사회 상규에 어긋나서 계약 자체가 무효가 되지 않는 한) 계약서가 민법 규정보다 우선한다. 따라서 당사자 사이에 미술품과 같은 고가의 물건의 대여에 관한 계약은 서면계약에 의하여 명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유상으로 미술품을 임대하는 경우, 일반적으로 대여자는 대여료(차임) 청구권을 가지게 된다. 미술은행에서 무상으로 임대하는 경우에는 미술품 대여에 따른 운반, 전시, 보관, 보험 등 전시에 드는 비용을 차용인이 모두 부담하도록 하는 대여 계약을 하는 경우가 많고, 이 경우에는 사실상 대여료(차임)에 준하는 비용 부담을 차용인이 지도록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여자에는 기본적으로 미술품을 차용인에게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다만 미술품 대여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고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운송 사고이므로 대여 계약에서 운송 중의 사고에 대비하는 규정은 필수이다. 또한 대여자는 대여 미술품에 대한 자료, 슬라이드 등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반대로 차용인은 기본적으로 당해 미술품을 사용, 수익할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대여 미술품을 이용한 전시에 따른 입장료, 카탈로그 판매 등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미술은행의 경우에는 대여목적이 주로 공공복리나 비영리에 있으므로 상업적 수익을 올리는 것을 금지하는 대여 계약을 할 수 있고, 차용인이 이를 위반하는 경우에는 계약 해지의 원인이 되어 대여 미술품을 즉각 반납해야 할 수도 있다. 유상계약인 경우 차용인은 대여자에게 대여료를 지급할 부담이 생긴다.
대여료는 반드시 금전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대여료의 금액에도 별도의 제한은 없다. 실무상으로도 대여료를 비율로 정확히 정하는 경우는 없다. 차용인은 대여 미술품을 대여자에게 반환할 때까지 주의를 기울여 이를 보관해야 하는 의무도 지닌다.
미술품 대여 계약은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경우 그 기간이 만료되면 대여 계약이 종료된다. 물론 계약이 중간에 해지되거나 대여 전에 취소될 수도 있다. 2000년경 ○○미술관이 기획하였던 기획전이 전시작품 확보에 실패하여 전시 2주일을 앞두고 취소된 예가 있다.
이러한 경우, 일부 작품을 대여하려고 했던 대여자는 일반적으로 차용인(○○미술관)의 취소에 따른 대여 계약 위반을 이유로 차용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미술관은 이러한 손해배상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대여 미술품을 인도받기 전 어떠한 이유로라도 전시가 취소되는 경우 이런 취소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책임이 없다는 계약 조항을 마련해두었기 때문에 손해배상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글 | 이재훈
문화 칼럼니스트, 변호사,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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