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천재 ‘미켈란젤로’ 조명

[아츠앤컬쳐] 명화를 움직이는 영상으로 구현하는 컨버전스아트 <반고흐10년의 기록展>, <헤세와 그림들展>, <모네, 빛을 그리다展>을 연달아 흥행시키며 반포한강공원 솔빛섬에서 <헬로아티스트展>을 개최하고 있는 ㈜본다빈치(대표 김려원)가 르네상스 시대의 3대 천재 중 한 명인 미켈란젤로를 조명한 <미켈란젤로展>이 용산 전쟁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한다.

<미켈란젤로展>은 본다빈치㈜의 다섯번째 컨버전스 작품으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대표적 조각가,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삶과 그의 명작을 최첨단 영상기술과 결합해 펼치는 전시다. 이번 전시는 박물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공간으로 구성한 ‘뮤제오그라피’ 콘셉트로 제작되었다. 그의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재창작한 이번 전시에서는 미켈란젤로의 고집스러움이 조각과 그림에서 어떻게 자유롭게 표현되었는지 그의 작품과 명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3세 때 당대 유명 화가였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미켈란젤로는 칠십 평생 동안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등의 그림과 ‘피에타’, ‘다비드’와 같은 조각을 제작한 르네상스 최고의 아티스트다. 평생을 오로지 예술 하나만을 보고 살아온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의 3대 천재화가로도 불린다.

23The Prophet Jonah, 1511 [예언자 요나]
23The Prophet Jonah, 1511 [예언자 요나]

이번 전시에서는 그를 예술가로 성장시킨 메디치의 묘소와 그의 작업실, 성 베드로 성당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을 비롯하여, 창세기 내용을 바탕으로 그린 시스티나 천장화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등이 국내 최초 컨버전스아트로 재창조된다. 전시장 한편에는 그가 평생에 걸쳐 심혈을 기울였던 조각 작품도 3D 영상으로 선보이게 된다.

㈜본다빈치 김려원 대표는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가 혼합된 뒤섞인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도 예술은 존재하고 우리의 영혼을 더듬는 예술가들은 탄생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3대 천재로 불리며 온갖 어려움이 닥쳐도 열정과 노력으로 한계를 극복한 화가 미켈란젤로의 생애와 아름답고 유려한 그의 작품을 통해 관객 모든 분들이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는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고 전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작가의 생애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소규모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직후 석공의 아내였던 유모에게 맡겨졌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고 미켈란젤로도 다른 귀족들의 후손들처럼 고전문법학교에 다녔지만 라틴어보다 그림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해 아버지와 갈등을 겪었다. 결국 그는 열세 살 때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갔다. 그러나 1년쯤 지나서부터 미켈란젤로는 이미 다른 곳에서 영감을 구하고 있었다.

20The Prophet Ezekiel, 1510 [선지자 에스겔]
20The Prophet Ezekiel, 1510 [선지자 에스겔]

그는 그라나치를 통해 연로한 조각가 베르톨도를 알게 되었다. 베르톨도는 피렌체 출신의 위대한 조각가 도나텔로의 제자였다. 베르톨도는 1491년에 사망했으나 젊은제자 미켈란젤로의 재능이 워낙 탁월하여 로렌초 데 메디치는 자신의 궁에 방을 마련해 주고 후한 보수를 지급했다. 그러나 1년도 못 가서 로렌초가 죽고 그로부터 2년 후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혼란의 시기가 지나고 1496년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갔다.

미켈란젤로는 고대 조각에 대해 이미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2세기 로마의 <잠자는 큐피드>를 모사한 적이 있었는데, 진품과 너무나 흡사하여 미술거래상이 이 작품을 고대 진품이라 속이고 팔아먹은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속임수임이 드러났을 때 미켈란젤로는 오히려 뛰어난 재능에 대해 찬사를 받았다.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의 첫 번째 의뢰인이 되어준 사람은 바로 그 모사품을 구입한 리아리오 추기경이었다. 리아리오 추기경은 그를 로마로 초청했고, 이 때 <바쿠스>와 <피에타>를 제작한다. <피에타>는 무거운 감상주의에 빠지는 대신 절제되고 아름다운 날카로움을 표현했으며 신의 섭리에 대한 복종을 다룬 심오한 작품이다.

19Sistine Chapel Ceiling Cumaean Sibyl, 1510 [쿠마이의 무녀]
19Sistine Chapel Ceiling Cumaean Sibyl, 1510 [쿠마이의 무녀]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피렌체 정부로부터 다윗 상을 의뢰받는다. 높이가 4미터에 달하는 이 작품으로 미켈란젤로는 동시대 최고의 조각가로 손꼽히게 됐고 <다윗>상은 오늘날까지도 피렌체 정치의 심장부를 지키고 있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는 일을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작업의 프로그램을 짜고 거기에 따라 일을 진행해나갔다.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해나가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목과 눈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혼자서 4년 만에 이 대작을 완성하였다.

151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죽고 조반니 데 메디치가 레오 10세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의 영묘 작업만을 고집했다. 수많은 재계약과 계약수정을 거쳐 마침내 1545년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완성된 작품은 당초의 웅대한 계획에 비해 매우 초라한 규모였다. 미켈란젤로는 <레아>와 <라헬> 등 대비되는 두 인물을 조각하여 2단으로 된 기념비의 하부작업만을 담당했는데, 각각 행동하는 삶과 명상하는 삶을 상징하는 두 조각상은 웅장한 대리석 조각 <모세>의 양쪽에 놓였다. 실물보다 크게 표현된 모세는 머리에 달린 뿔과 뱀처럼 구불거리는 긴 수염과 화난 표정으로 마치 괴물을 연상시킨다.

1534년 교황 바오로 3세가 선출되고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로마 교황청 최고의 건축가, 조각가, 화가’로 임명했다. 미켈란젤로는 1536년부터 1541년까지 쉬지 않고 <최후의 심판>작업에 매달렸다. 60대 노인의 강도 높은 육체적 작업에서 비롯된 창조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2월, 89세를 일기로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의 소망에 따라 시신은 비밀리에 피렌체로 이송되었고, 지금은 그가 어렸을 때 예술의 세계를 익혔던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전시개요
2016년 8월 20일(토)~11월 3일(목)
장소 용산 전쟁기념관 기획전시실
시간 화~금 오전 10시 ~ 오후 6시 *입장마감 오후 5:00
티켓 성인 1만5천 원, 학생 1만2천 원, 아동 8천 원
문의 본다빈치 1661-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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