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트럼보>는 냉전 시대 정치적 상황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자신의 이름으로는 글을 쓸 수 없었던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의 인생을 그린 제이 로치 감독의 영화이다. 작가 트럼보는 <로마의 휴일>과 <브레이브 원>으로 두 번의 아카데미 극본상을 받았다. 그러나 동료의 이름을 빌려서 받거나 가명으로 받았다. 트럼보 사망 후 <로마의 휴일> 원작자가 트럼보임이 밝혀져 영화개봉 40년 만에 원래 주인에게 트로피가 돌아갔다.

영화가 시작되면 욕조에서 타이프 치는 트럼보(브라이언 크랜스톤)의 모습이 나온다. 작가라면 바로 그럴 것만 같은 주인공의 포스가 화면 가득히 뿜어져 나온다. 영화 촬영장과 인기 배우 에드워드 로빈슨(마이클 스털버그)의 파티장으로 가는 트럼보의 모습이 나오다가, ‘반미 활동 조사 위원회’뉴스로 극장에서 봉변을 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약간의 불안한 기운이 바닥에 깔리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MGM의 루이스 메이어 사장과 가장 높은 원고료를 받고 3년 계약을 맺는다. 사장은 조건으로 트럼보를 싫어하는 칼럼니스트 헤다 하퍼(헬렌 미렌)의 비난 기사를 보지 않기를 원한다고 한다. 불안은 살짝 증폭된다. 트럼보와 친구들은 트럼보의 목장에 모여 MGM과의 기록적인 계약을 축하한다. 트럼보의 부인 클레오(다이안 레인)가 컵으로 저글링 묘기를 보여준다. 아 뭐지? 저글링이란 게 고도의 훈련에 의한 균형잡기 아닌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조이는 묘기인데 왜 이게 나올까? 이 순간 멀리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승용차에서 트럼보를 청문회에 세우겠다는 소환장이 전달된다.

결국, 트럼보는 1년 간 감옥에 갔다 온다. 그리고 ‘헐리우드 10’이라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잘나가는 영화사와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출소 후 만난 옛 친구 버디 로스(로저 바트)가 모른 척하는 수모를 겪으며 다른 대책을 세워야만 하게 된다.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파산에 이른 그는 B급 영화를 제작하는 ‘킹 브라더스 영화사’를 찾아간다. 자신의 이름을 크레딧에 올리지 않는 조건으로 기존 작가의 고료로 저렴하게 작품을 쓰겠다고 한다.

3일 만에 작품을 써 온 그에게 프랭크 킹(존 굿맨)은 천재라 하며 그들이 보유한 다른 작품의 수정까지 요청한다. 블랙리스트가 있으면 블랙마켓이 있다는 트럼보의 말대로 가성비가 높은 그의 작품들은 수요가 점점 늘어 그 혼자만이 공급할 수 없을 정도로 된다. 그는 11개의 가명을 쓰면서 생계도 생계지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동료들에게도 B급 영화 시나리오 창작에 동참하도록 한다. 물론 트럼보의 생각처럼 변신이 되지 않는 작가도 있다. 자신들이 예전‘퓰리처상’이나 ‘전미도서상’을 받은 사실을 말하며 낯간지러운 작품을 쓰기 난감해한 것이다.

예술 작품은 무차별적이다. 예산이 얼만지 누가 만들었는지 등은 참고 사항이다. 작품성으로 승부하게 되는 거다.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보면. 유명 작가가 썼거나 유명배우가 출연한다고 해서 꼭 흥행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축구스타 호날두가 노인 분장을 하고 길거리에서 청소년과 축구로 드리블링 묘기를 보이는 몰래카메라가 있었다. 경기를 하는 사람이나 구경꾼이나 모두 호날두라 생각하지 않다 보니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 묘기를 노인의 묘기라고 여겨 연신 감탄을 한다.

트럼보의 경우가 딱 이렇다. B급 작가로 변신했으니 사람들은 고만고만한 작가가 쓴 작품이라 생각하고 보지만 사실 아카데미 상을 두 번 받은 작가가 집필하는 것이니 얼마나 작품 수준이 높을 것인가 말이다. 딱 노인 분장한 호날두와 같은 경우다. 실력은 숨길 수가 없다 보니 소문이 슬금슬금 퍼져 ‘킹 브라더스 영화사’에 트럼보나 공산주의자를 쓰면 영화를 보이콧하겠다는 협박을 하는 유니온의 로이 브로워(댄 바케달)가 찾아오지만 무작스럽게 야구방망이로 다스리는 프랭크에게 얻어터지고 돌아가는 모습에선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커크 더글러스(딘 오거먼)와 오토 프레밍거 감독 (크리스천 버켈) 등 메이저 영화계 사람들이 찾아온다. 물론 그들과 만든 영화는 모두 대히트를 친다. <스파르타쿠스>와 <영광의 탈출, Exodus>이다. 그들이 트럼보와 작업하면 폭로하겠다는 헤다 하퍼의 협박도 케네디 대통령의 영화관람으로 막을 내린다.

트럼보는 ‘블랙리스트 10’이 유명무실해진 후, 상을 받는 자리에서 피해자나 가해자를 영웅과 악인이 아닌 시대의 희생자로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트럼보를 연기한 브라이언 크랜스톤의 눈을 유심히 봤다. 자기도 모르게 괴물이 되다 다시 자신을 돌아보면서 딸과 대화를 할 때 그리고 자신의 소신을 밝힐 때 모두 눈에서 나오는 아우라가 무언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하고 있어 너무 좋았다. 강이 바다로 갈 때 구불구불 가지만 강에게는 그게 바로 직선이라는 어디선가 읽은 구절이 뜬금없이 생각났다.

글 | 강인식
전 KBS, SBS PD, 전 싸이더스FNH 대표, 현 kt미디어 콘텐츠담당 상무
ilpas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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