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로크 회화의 거장

벨라스케스 자화상, 1640-1650,유화, 45×38 cm,Museo de Bellas Artes, Valence© Museo de Bellas Artes, Valence
벨라스케스 자화상, 1640-1650,유화, 45×38 cm,Museo de Bellas Artes, Valence© Museo de Bellas Artes, Valence

 

[아츠앤컬쳐] 17세기는 스페인 미술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문화와 예술이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15세기 말 신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의 인구 증가, 풍부한 자원,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인한 국가의 번영이 밑받침이 되었다. 17세기 스페인 미술의 특징을 요약하면 첫째는 천주교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지배적이었고, 둘째는 리얼리즘을 통한 실체에 근접한 화풍을 추구하였다. 이는 당시 성당을 포함한 천주교 건축물이 다수 건립되면서 장식화를 비롯한 주문이 급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였던 남미대륙과 동남아국가에도 이러한 작품들이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immacule conception
immacule conception

더불어, 종교인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술 작품을 통하여 삶과 현실에 대하여 묵상할 것을 권장하였다. 도덕적인 메시지를 담은 그림 외에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정물화도 유행하였다. 17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로는 디에고 벨라스케즈(1599-1660),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1598-1664), 주세페 데 리베라(1591-1652),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1682)와 후안 산체스 코탄(1560-1627)을 들 수 있다.

세비야 태생의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서양미술사에서 수세기를 통틀어 예외적인 천재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스페인의 왕 필립 4세의 궁중화가로 불리는 그는 플랑드르 미술의 반 에이크와, 이탈리아의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니니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뿐만 아니라, 벨라스케스의 출중한 예술성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17세기 바로크의 대표작가인 이탈리아의 카라바지오와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와 동일 선상으로 평가된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 1650년, 유화, 140×120 cm, Roma, Galleria Doria Pamphilj © Amministrazione Doria Pamphilj srl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 1650년, 유화, 140×120 cm, Roma, Galleria Doria Pamphilj © Amministrazione Doria Pamphilj srl

또한, 세기의 화가들이 앞다투어 그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어 경의를 표하는 오마주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피카소가 남긴 ‘시녀들’을 들 수 있고, 이는 살바도르 달리와 리차드 해밀턴에 의해서도 재해석 되었다. 그리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도 영국 작가 프란시스 베이컨과 중국 작가 유에민준에 의해 재해석 되었다. 한편, ‘잔디위의 식사’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인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화가중의 화가’라며 경의를 표했다.

Venus la toilette
Venus la toilette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1599년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스페인 남부지방인 안달루시아의 주도 세비야는 당시 스페인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로 한창 전성기를 누렸다. 세계의 최신문화가 그곳을 통하여 전파되었을 정도로 유럽에서 가장 교류가 활발한 도시 중 하나였다. 안달루시아에서 존경받는 화가이자 문인인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아뜰리에에는 당대 세비야의 최고의 지식층들이 드나들면서 토론하고 공부하는 아카데미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벨라스케스는 1611년 열두 살의 나이에 일찍이 파체코의 도제로 있으면서 회화기법, 천주교 도상학뿐만 아니라 파체고의 아뜰리에를 드나드는 문화계 인사들로부터 인문학, 자연과학 등 폭넓은 지식과 교양을 쌓았다.

조랑말을 탄 발타자 카를로스 왕자, 1634-1635, 유화, 211,5 x 177 cm, Madrid, Museo Nacional del Prado © Madrid, Museo Nacional del Prado
조랑말을 탄 발타자 카를로스 왕자, 1634-1635, 유화, 211,5 x 177 cm, Madrid, Museo Nacional del Prado © Madrid, Museo Nacional del Prado

1617년 벨라스케스는 화가조합의 정식 회원이 되었고, 이듬해 그의 스승의 딸인 조아나 파체코와 혼인하였다. 초기작으로 다양한 화풍의 정물화를 수십 점 남겼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유럽 왕가의 컬렉션으로 소장되어 있다. 1620년대부터 그는 이탈리아로부터 전해온 ‘카라바지즘’의 영향을 받았다. 이를 접하게 된 계기는 이미 로마와 나폴리에서 체류한 주세페 리베라의 작품을 통해서였다.

파란 드레스를 입은 마가리트 공주, 1959년경, 유화,127 x 106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e ©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파란 드레스를 입은 마가리트 공주, 1959년경, 유화,127 x 106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e ©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1623년 8월 30일 처음으로 필립 4세의 초상화를 그리는 영광을 얻게 된다. 마침내 그는 왕의 화가로 임명을 받으면서 훗날 최고의 사회적 위치에 오르게 된다. 왕의 화가로서 그는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는데, 당시 유럽의 왕족들과 천주교의 주교들은 당시 최고의 미술품 컬렉터였다.

democrite
democrite

1628년에는 루벤스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필립 4세에게 젊은 화가인 벨라스케스가 이탈리아를 여행할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어 줄 것을 권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덕분에 1630년 벨라스케스는 바르셀로나 항구에서 출항하여 제노바를 거쳐 베니스에 도착한다. 그리고 페라라를 거쳐 로마에 도착한다. 로마에 도착한 그는 고전작품을 직접 눈으로 접하고, 풍경화를 그리며 이탈리아 예술에 심취하였다. 처음으로 역사를 주제로 대작에 도전하면서 종교화와 비종교화를 두루 섭렵하게 된다. 또한, 카라바지즘의 극적 표현과 신베니스풍의 색채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la tunique de Joseph
la tunique de Joseph

벨라스케스가 남긴 최고의 걸작 ‘시녀들’을 보면 그는 왕가와 함께 자신이 작업을 하고 있는 자화상을 그릴 정도로 예술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했었다. 이처럼 그는 수많은 왕가의 초상화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담은 작품도 다수 남겼다. 17세기 스페인의 화가인 리베라와 무리요도 난쟁이, 걸인, 노동자, 서민들의 삶을 따뜻한 화가의 시선으로 화폭에 담았다. 이처럼 미화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사회와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소재로 한 작품은 훗날 반고흐와 밀레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mulata
mulata

벨라스케스 작품의 상당수는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외부로의 대여가 지극히 제한적이라 좀처럼 기회가 없었는데 2015년 봄에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소재한 쿤스트히스토리세스미술관 전시가 있었고, 이어서 파리의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올해 7월 13일까지 순회 회고전이 열린다. 올여름 파리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놓쳐서는 안 될 특별한 볼거리이다.

글 | 이화행
아츠앤컬쳐 파리특파원, 파리 예술경영대 EAC 교수
소르본느대 미술사 졸업, EAC 예술경영 및 석사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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