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nne Deniau / Opéra national de Paris
© Anne Deniau / Opéra national de Paris

 

[아츠앤컬쳐] 빅토르 위고 원작, 롤랑 프티 안무, 모리스 자르 작곡, 입생로랑 의상이라는 것만으로도 파리의 문화마니아들은 바스티유 극장을 찾기에 충분하다. 막이 열리자 콰지모도가 무대의 안쪽에서 거대한 종을 울린다. 텅 빈듯한 무대는 이내 중세 복장을 알록달록하게 입은 남녀행렬로 가득히 매워진다.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 무대의상을 디자인하면서 강렬하고 다양한 색채를 통하여 마치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연출하고 싶었다. 동시에 몬드리안의 작품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무대의상 디자인을 한 입생로랑이 1996년 한 인터뷰에서 한 얘기다. 특히 입생로랑이처음으로 무대의상을 디자인한 것이라 애착이 남달랐을 것이다. 이번 발레는 안무가 롤랑 프티(Roland Petit)의 작품으로 1965년 12월 11일 파리 국립오페라 공연에서 초연된 것이다. 2막 13장으로 구성된 노트르담 드 파리는 아카데믹하거나 클래식하기보다는 연극적인 요소가 풍부한 발레이다.

“나는 이 극에서 치명적인 열정을 내포한 세 사람의 인물을 보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에스메랄다(Esmeralda)를 표현하고 싶다. 그녀는 보헤미안의 피를 타고났기에 어떻게 보면 마녀적인 성격도 지니고 있다. 콰지모도(Quasimodo)는 괴물이 아니다. 단지 사고로 인하여 콤플렉스를 지닌 인물이다. 이 두 인물은 지나친 개성, 또는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독자적인 성격 때문에 배타 당한다. 프롤로(Frollo)의 경우 자신의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이다. 정신과 육체 사이에서 말이다. 시대를 초월한 이 세 인물의 스토리는 현재에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1974년 발레가 초연될 당시 롤랑 프티가 한 말을 인용했다. 20세기 후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발레 안무가인 그는 50여 편 작품을 남겼다. 특히 영화 백야에 등장했던 안무작인 ‘젊은이의 죽음’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맨바닥 춤이면 어때? 멋지면 되지.”라고 했던 롤랑 프티는 열여섯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안무작을 낸 놀라운 경력을 지녔다.

1924년 파리의 근교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원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에 샹젤리제 발레단을 창단하며 안무가와 무용가의 길을 겸하게 되었으며, 후에 1970년에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감독을 역임하였다. 이후 마르세유 발레단의 단장과 안무가로 26년간 활동하였으며, 2011년 7월 10일에 스위스에서 백혈병으로 타계했다.

롤랑 프티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1978년 3월에 이화여대 강당에서 내한 공연이 있었다. 고전발레 외에는 별로 접할 기회가 없었던 한국 관객들에게 그의 음울하면서도 전위적인 발레는 센세이션 자체였다고 한다. 혹자는 한국에 모던 발레를 전해준 이가 롤랑 프티라고 한다. 한편 그의 어머니가 바로 발레리나 슈즈로 유명한 레페토 브랜드의 창설자인 로즈 레페토이다. 발레리노인 아들을 위해서 발이 아프지 않은 슈즈를 만들겠다는 어머니의 아들 사랑하는 마음이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글 | 이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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