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활명수가 아닌 115년의 세월
[아츠앤컬쳐] 갑자기 얼굴이 하얘지고 하품이 나며 가슴이 답답하다고 느낀 나는 약국으로 달려갔다.
“까스활명수 주세요!” 까스활명수! 꼭 그렇게 강하게 발음해야 한다. 그냥 활명수가 아니라 까·스·활·명·수!
소화기관이 좋지 않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소화제를 달고 살았다. 조금만 빨리 먹어도 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식사해도 탈, 빵이나 찹쌀떡처럼 텁텁한 음식을 마실 것 없이 먹어도 탈. 추운 곳에서 식사해도 탈.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탈!탈!탈!이었다. 체하고 토할 때마다 엄마는 “까스활명수 먹자!”고 말씀하셨다.
어린 나는 알싸한 생약 성분의 향과 특유의 탄산가스가 싫어 코를 막고 마시곤 했다. 마실 때는 괴로워도 마시고 나면 답답했던 가슴이 확 풀려 맛과 향이 싫어도 거부할 수 없었다. 활명수에 대한 애정은 어른이 돼서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만큼 식체가 자주 생기지는 않지만 싫어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식사라도 한 날이면 예민한 성격이라 여지없이 체한다. 약국 가서 “소화제 주세요!”라고 말하면 약사는 알약 형태의 소화제를 주는데 그때 나는 “까·스·활·명·수로 주세요!”라고 다시 말한다. 쌍둥이 아들이 체했을 때도 까스활명수를 먹인다.
친정 엄마가 나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다른 이유도 있다. 알약 형태의 소화제를 잘 넘기지 못하는 아들도 활명수는 액체 형태라 목 넘김이 쉽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합성 원료가 아닌 생약 성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마셔 온 까스활명수가 역사가 그렇게 오래된 줄 몰랐다.
“까스활명수 알아?”
“그럼요. 체했을 때 그거 마시죠.”
“까스활명수가 몇 년 정도 됐을 것 같아?”
“한.....50년?”
“까스활명수 알지?”
“물론이죠. 저희 시아버님은 속이 안 좋으시면 꼭 그거 드세요.”
“까스활명수가 몇 년 됐을 것 같아?”
“음...60년? 아닌가? 50년?”
모두 그렇게 대답했다. 50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100년이 넘었을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을 못한다. 까스활명수를 달고 살았던 나도 그런 줄 알았다.
60년 정도 됐겠지......했다. 그런데 115년 됐다. 구한말 왕께서 마시던 궁중 소화제였고 서민들의 배앓이를 달래주던 고마운 물이었다. 혼란했던 일제 강점기 역사와 함께하면서 독립 운동가들의 경제적인 든든한 지원군 역할도 했다. 가장 오래된 등록 상품 ‘활명수’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2009년에는 한국 산업의 브랜드 파워 조사에서 ‘대한민국 1% 가치 브랜드’로 뽑혔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늘 우리 곁에 있었는데 너무 가까이 있어서 잘 몰랐다.
활명수는 1897년 당시 궁중 선전관이었던 민병호 선생이 궁중 비방을 일반 대중에게 보급하기 위해 11가지의 순수 생약 성분에 서양의학의 장점을 더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이다. 활명수가 신통한 효험을 보이자 사람들은 활명수를 이름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고 불렀다. 생명수인 활명수가 115년이라는 세월 동안 11가지 생약 성분 하나 바뀌지 않고 1967년 탄산가스만 추가된 채 국민 소화제로서의 자리매김을 확고히 해오고 있다. 2011년까지 81억 병이 판매됐다. 이 병을 한 줄로 세우면 지구를 24바퀴 돌 수 있는 양이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지며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5천 년 역사라고 자랑하면서 100년 넘는 국민 브랜드 하나 없는 우리나라 현실이 많이 안타깝다 생각했다. 치부의 설욕이 담긴 역사 건물은 부끄럽다고 없애 버리고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어도 기술 장인은 천해서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의 정서 속에서 100년을 이어가는 브랜드가 나오기는 쉽지 않을 거라 속단했다.
100년 넘게 우동 국물만 끓여 온 가마솥을 식지 않게 하려고 명문대를 나온 아들이 자신의 꿈을 접었다는 일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리고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유럽 브랜드를 접할 때마다 그게 패션 용품이든 생활 용품이든 참 부러웠다. 그런데 까스활명수가 115년이 되었다. 허준의 동의보감을 보면서 한방 의술에 관한 한 스토리가 있고 역사가 깊다고 생각한 분야에서 어쩌면 가장 잘 만든 상품이 나올 수 있는 분야였는지도 모른다.
스토리가 있는 상품은 사라지지 않는다. 스토리는 애정이고 집념이고 열정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명품 브랜드를 접하면서 내가 가장 감동하는 명품의 잣대는 스토리다. 탄생 스토리와 시간과 함께 축적되어온 감동 스토리. 스토리가 있는 브랜드는 소비자가 감동한다. 200년을 내다보는 까스활명수를 알고 나서 이제 우리나라에도 곧 샤넬이나 조르지오 아르마니 같은 멋진 패션 명품이 탄생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유난희
명품 전문 쇼호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