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스스로 새장 속에 갇히기를 원한 한 마리의 새가 있었다. 새장의 주인은 그 새가 무척 마음에 들어 자기 새장에 거할 동안 그 새에게 모든 정성을 쏟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새장을 차지한 새는 새장의 문이 열려 있어도 결코 나가려 하지 않았고, 그런 새를 깊이 사랑하게 된 새장의 주인은 그 새를 바라보는 것으로 평생의 낙을 삼았다. 세월이 흘러 그 새가 죽어버리자 더 이상 새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새장의 주인은 여생을 영원한 슬픔 속에서 보냈다.
색채의 마술사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와 그의 영원한 모델 마르트 부르쟁(Marthe Boursin, 1869-1942). 두 사람의 관계는 앞서 언급한 새장 주인과 새의 관계와 같은 것이었다. 보나르가 마르트를 처음 만난 것은 1893년. 보나르의 나이 26세, 마르트의 나이 24세 때였다. 그러나 그때 마르트는 자신의 나이가 16살이라고 보나르를 속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보나르는 파리 오스망 거리를 지나가다가 마르트를 만났다고 한다. 그녀가 파리의 한 기차역에서 내릴 때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마디로 길가다 한눈에 끌렸다는 것인데, 그 끌림은, 일단 화가로서 “아, 저 소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 하는 차원이었던 것 같다. 이때 마르트는 장례용 조화를 만드는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전에는 침모 일을 하거나 심부름꾼 일을 했다고 하니 출신 배경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녀는 본 이름인 마리아 부르쟁 대신 마르트 드 멜리니라는 예명을 짓고 이것을 즐겨 사용했다. 당시 파리의 화류계 여성들이나 신분상승을 꿈꾸는 노동자 계층의 여성들이 이처럼 ‘드(de)’가 들어가는 귀족풍의 이름을 지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고양된 듯 처신을 하곤 했는데, 마르트의 작명도 이런 시대적 풍조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마르트는 일찍부터 자신에 대한 진실을 감추고 환상의 세계로 숨어드는데 익숙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태도는 어떤 불법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일부러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골탕먹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맞부딪치기에는 자아가 너무 왜소하고 연약했기에 그녀는 이런 ‘작은 거짓’으로라도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한 마리의 작고 불쌍한 새처럼 보였다.
“그녀는 한 마리 새 같았다. 놀란 듯한 표정, 물에 몸을 담그기를 좋아하는 취향, 날개가 달린 것처럼 사뿐사뿐한 거동…”
보나르의 친구 타데 나탕송의 말하듯 마르트는 진실로 튼튼한 새장이 필요한 작은 날짐승이었다. 보나르는 그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 새장을 제공한 이였다. 보나르는 모델로서 마르트가 썩 마음에 들었다. 늘 가까이 두고 그녀를 그렸으며, 나아가 연인으로서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하지만 그는 그녀와의 결혼을 기피했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것이 1925년의 일이니, 무려 32년간 함께 살면서도 부부의 연을 맺지 않았다. 보나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품에 날아든 저 작고 여린 새가 진정으로 제대로 된 아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던 것 같다.
그럼에도 보나르가 말년에 마르트와 정식으로 결혼한 것은 무엇보다 그녀에 대한 고마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신의 예술이 이뤄낸 풍성한 성취 앞에서 화가는 마르트의 공을 어떤 형태로든 인정해 주고 싶었다. 일반적인 아내의 역할에는 젬병이었을는지 몰라도, 마르트는 그의 매력적인 작품의 중요한 원천이요, 뮤즈였다. 한 미술사가의 집계에 따르면 마르트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보나르의 그림이 무려 384점에 이른다고 한다. 보나르의 저 아름답고 관능적인 예술은 결코 보나르 혼자의 힘만으로 이뤄낸 것이 아니었다.
보나르의 작품에서 마르트의 이미지를 가장 잘 대표하는 장면은 그녀가 목욕을 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보나르가 앵티미스트(Intimist: 사적이고 일상적인 사건이나 사물을 개인의 정감을 강조하여 그리는 화가)란 별명을 얻은 것도 바로 마르트의 남다른 목욕 취미 등 그녀의 사생활을 깊이 사랑하고 즐겨 표현했기 때문이다. 마르트는 심신증을 비롯해 피해망상, 강박증, 신경쇠약 따위의 정신적 질환을 앓았다고 하는데, 그녀가 목욕을 즐겨 한 것도 그녀의 병적인 결벽증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목욕하는 모습을 본 한 친지는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다.
“마르트는 섬세하고도 감각적인 손길로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비누 거품을 바르고, 몸을 문지르고, 마사지를 해야 직성이 풀렸다. … 그녀가 원한 유일한 사치는 수돗물이 콸콸 나오는 욕실이었다.”
마르트가 그렇게도 원했던, 수돗물이 나오는 욕실은 두 사람이 베르농 근처에 마 룰로트라는 새 집을 얻었을 때 비로소 설치되었다. 20세기 초까지도 독립된 욕실을 갖는다는 것은 웬만큼 넉넉한 프랑스 가정이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후 이 욕실은 이 집의 ‘성소(聖所)’가 되었고, 보나르는 이 성소에서 벌어지는 ‘정결 의식’을 그림의 핵심적인 주제로 삼았다.
<욕조 속의 누드>는 보나르가 마지막으로 그린 마르트의 이미지다. 마르트가 욕조에 편안히 누워 한가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영원히 욕조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가 평소 얼마나 목욕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화려한 욕실의 색조는 그런 그녀에 대한 보나르의 오마주다. 물속으로 풀어진 그녀의 몸은 보석보다 더 영롱하고 그녀로부터 퍼져 나가는 광채는 무지개보다 더 찬란하다.
이 무렵 마르트의 욕실은 실제로는 하얀색이었다고 하는데, 화가에게는 이렇듯 무지갯빛으로 비쳤으니 그녀의 존재가 그에게 얼마나 화려한 광원(光源)이었는지 알 수 있다. 마르트의 아름다움은 이 밖에도 <욕조의 분홍 누드>, <빛을 받는 누드> 등을 통해 선명히 확인할 수 있다.
평생 마르트의 벗은 몸을 수없이 그렸으면서도 보나르는 결코 나이 든 모습으로 그녀의 몸을 그린 적이 없다. 이 그림에서도 젊은 날의 그 ‘슬림’한 몸매가 화면을 아름답게 가르고 있다. 이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 미의 기념비로 남았다는 점에서 마르트는 보나르에게 진실로 운명적인 뮤즈였다.
물론 화가에게는 이처럼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이었다 해도, 보나르의 친구나 친지들에게는 마르트가 아주 골치 아픈 존재였다. 연약하고 신경질적인데다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를 갖고 있었던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심한 편집증 증세를 보였다. 심지어 보나르가 외출해서 친구들을 만나는 것조차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그들이 “보나르의 비밀을 훔쳐간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그것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보나르는 강아지를 산책시킨다는 핑계로 집을 나와 동네 카페에서 비밀리에 친구들을 만나곤 했다. 상식적인 눈으로 보면 그런 여성과 오래 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것 같은데, 보나르는 뒤늦게 그녀와 법적으로 혼인까지 하며 알콩달콩 살았으니 부부의 연이란 세상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보나르는 그녀와 함께한 동안 그럴 수 없이 생산적인 창작활동을 했다.
보나르는 마르트와 자주 여행을 떠났다. 그녀의 정신적 질환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려 주기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 특히 목욕을 좋아하는 그녀의 취향에 맞춰 온천을 그 주된 목적지로 삼았다. 그러나 심신이 쇠약했던 그녀는 결국 보나르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핵성 후두염이 사망원인이었다.
마르트가 죽자 보나르는 그녀의 침실 문을 잠그고 다시는 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침실은 마르트 생전 그녀를 소재로 일상 정경을 담으면서도 보나르가 유일하게 그리지 않았던 공간이었다. 그 성소의 주인이 사라졌으니 이제 그 공간을 바라보는 것마저 견디기 힘든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 아끼는 새를 잃은 새장 주인의 심사가 그대로 묻어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글 | 이주헌
미술평론가, 양현재단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