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체를 날라 오는 형리들, 1789, 캔버스에 유채,323x422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다비드,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체를 날라 오는 형리들, 1789, 캔버스에 유채,323x422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아츠앤컬쳐] 1789년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귀족 중심의 봉건 체제와 전제주의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근대 자본주의의 길을 연 혁명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뿐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당대 프랑스의 미술과 정치가 의식적으로 만나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이끈 기폭제가 되었다. 이 흐름의 일선에서 혁명의 예술적 강령을 온몸으로 실천한 화가가 바로 신고전주의의 지도자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다.

다비드는 대혁명이 일어나자 혁명 진영에 적극 가담해 1792년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때 그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국왕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앙시앵 레짐을 허물어뜨리는 데 적극 나섰던 열혈 혁명가로서 그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나, 이로 인해 그는 부인으로부터 이혼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혁명의 지지자로서 다비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초기의 걸작 가운데 하나가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체를 날라 오는 형리들>이다. 이 작품은 로마의 공화제를 찬양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의식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애국적, 영웅적 이상과 공화주의적 자유 이념 등 혁명의 에토스가 충만한 걸작이다.

그림 왼편 전경에 보이는 남자가 브루투스다. 그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기원전 1세기의 브루투스가 아니라, 기원전 6세기 말 포악한 에트루리아인 왕 타르퀴니우스를 내쫓고 로마 공화국을 건설한 영웅 브루투스이다. 그는 매우 고뇌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그의 아들 하나가 역설적이게도 타르퀴니우스의 복위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공화제를 배신한 그의 아들에게 그는 사형을 언도했다. 다른 아들 하나에게도 형제의 음모를 알면서 이를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시 사형을 언도했다.

그림에서 브루투스의 뒤로 형리들이 아들들의 주검을 날라 오고 있다. 오른편의 여인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상실이 믿기지 않는 듯 대성통곡을 하며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슬프고도 참담한 현실 앞에서 브루투스는 꿋꿋이 스스로를 다잡고 있다. 공의를 지키기 위해 가족을 희생시킨 브루투스. 그런 그를 다비드는 진정한 애국자요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 다비드는 혁명의 이상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 하는 것과, 그 진정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처럼 순수하고 지고한 희생이 불가피함을 역설하고 있다.

, 마라의 죽음, 1793, 캔버스에 유채, 165x128cm, 브뤼셀 왕립미술관
, 마라의 죽음, 1793, 캔버스에 유채, 165x128cm, 브뤼셀 왕립미술관

대혁명의 이상을 표현했다 하더라도 다비드는 현실 자체를 직접적인 소재로 삼기보다는 이렇듯 주로 고대 주제를 활용했다. 예외가 없지는 않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마라의 죽음>이다. 이 작품은 그의 혁명동지 마라가 욕조 안에서 살해된 내용을 소재로 한 것이다. 혁명 당시 급진적인 산악파의 지도자였던 마라는 피부병이 있어 약을 푼 욕조 안에서 집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여인이 청원이 있다며 찾아와 문서를 내밀었는데, 마라가 그것을 읽는 사이에 여인은 그를 칼로 찔러 죽였다. 샤를로트 코르데는 지롱드당의 보수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림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엄격한 구도로 전반적으로 숙연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윗부분의 어둡고 빈 공간은 일종의 침묵 혹은 시간의 정지를 암시한다. 마라를 향한 묵념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죽은 마라의 자세는 서양 기독교 미술의 전형적인 피에타 상을 연상시킨다. 마라의 희생을 예수의 희생과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동지를 잃은 슬픔과 그의 위대한 지도력을 기리려는 다비드의 의지가 그만큼 비장하게 묘사되어 있는 작품이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뛰어든 만큼 다비드는 격랑이 이는 삶을 살았다. 그가 지지했던 로베스피에르가 과도한 공포정치 끝에 실각하자 그 또한 체포되었다. 몇 달 동안 뤽상부르 궁에 갇혀 지냈는데, 그때 독방에서 하염없이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그의 생애의 유일한 풍경화를 한 점 그리기도 했다.

이때 비록 헤어졌지만, 아내는 감옥의 그가 걱정이 되어 그를 찾아왔다. 아내가 전력을 다해 권력 요로에 애를 써 준 덕분에 마침내 그는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런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낀 다비드는, 그녀에 대한 변함없는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고, 두 사람은 1796년 재결합했다.

다비드, 사비니의 여인들, 1799, 캔버스에 유채, 385x522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다비드, 사비니의 여인들, 1799, 캔버스에 유채, 385x522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아내를 통해 사랑과 화해의 힘을 뼈저리게 느낀 다비드가 이를 주제로 제작한 작품이 <사비니의 여인들>이다. 감옥에 있을 때 면회 온 아내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이 작품은, 아내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헌사라고 할 수 있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통해 더 이상 갈등과 증오로 피를 흘리지는 말자고 동포들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이 그림 역시 로마 건국사를 소재로 하고 있으나, 앞의 두 그림보다 이른 시기의 일화를 다룬 것이다. 사비니 사람들은 테베레 강 동쪽에 살던 이탈리아의 한 부족이었다. 어느 날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가 이들을 연회에 초대했는데, 우호 증진이 아니라 젊은 사비니 여인들을 강탈하려는 목적으로 그리 했다. 당시 로마에는 여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잔치에 갔다가 졸지에 젊은 여인들을 빼앗긴 사비니의 남자들은 몇 년을 절치부심, 군사를 일으켜 로마로 쳐들어왔다. 로마인들과 사비니인들 사이에 대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일촉즉발의 전투 상황이 펼쳐지자, 갑자기 헤르실리아라는 여인을 필두로 납치됐던 사비니의 여인들이 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그새 로마인들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을 전장에 데리고왔다.

여인들은 전쟁으로 헛된 피를 흘리지 말자고 절규했다. 로마인의 피와 사비니인의 피가 함께 흐르는 아이들을 들어 보이며 전쟁을 중지하자고 호소했다. 이렇게 온 몸을 내던진 여인들의 중재로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양측은 평화협정을 맺고 합병을 했다. 사비니의 왕인 타티우스와 로마의 왕인 로물루스가 공동 집권 체제를 이뤄 함께 번영을 꾀하기로 했다. 관용과 화해에 바탕을 둔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게 된 것이다.

그림에서 검과 방패를 쥔 왼편의 남자가 사비니의 왕 타티우스다. 로마의 지도자 로물루스는 오른쪽에서 방패와 창을 들고 타티우스와 대적하려 한다. 그의 방패에는 늑대와 두 아기가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로물루스와 그의 쌍둥이 형제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설화를 반영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든 하얀 옷의 여인은 타티우스의 딸이자 이제는 로물루스의 부인이 된 헤르실리아다. 평화를 위해 과감히 나선 이 순결한 여인이 화가의 아내를 상징함은 물론이다. 아내를 향한 깊은 신뢰와 사랑을 다비드는 그렇게 표현했다. 프랑스가 오래도록 평화롭기를 바라는 화가의 간절한 염원이 생생히 느껴지는 그림이다.

이렇게 권력에서 밀려난 그에게 새로운 전기가 찾아온 것은 나폴레옹의 부상이었다.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자 그를 제정의 수석화가로 삼았다. 사실 기존의 급진적인 공화주의자가 보나파르트주의자가 되어 제정과 독재를 지지한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 있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그는 <사비니의 여인들>을 그리며 더 이상 정치에 뛰어들고 싶어 하지 않지 않았던가.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0~01, 캔버스에 유채, 271x232cm, 국립 말메종 박물관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0~01, 캔버스에 유채, 271x232cm, 국립 말메종 박물관

하지만 다비드가 보기에 나폴레옹은 혁명의 이상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고, 제정의 절대군주 통치와 혁명이 이뤄놓은 민주주의적 성과를 조화시키고자 나름대로 애를 쓰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지지함으로써 다비드는 다시 프랑스의 문화예술 정책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최고의 문화 권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출세도 잠시, 나폴레옹의 몰락은 곧 그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면서 그는 브뤼셀로 망명해야 했다. 그리고는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망명지에서 풍운아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그림은 대부분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미화한 그림이다. 다비드의 초점이 혁명에서 영웅으로 옮겨진 것이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도 그렇게 나폴레옹을 미화한 작품이다.

후리후리하고 늘씬한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군대와 함께 험한 협곡을 넘어가고 있다. 하지만 실제 나폴레옹은 그림에서 보듯 후리후리하지 않았고, 또 말을 타고 군대와 함께 산을 넘지도 않았다. 나폴레옹은 부대가 먼저 넘어가고 며칠 뒤 말이 아니라 노새를 타고 따로 안전하게 산을 넘어갔다고 한다. 다비드는 역사적 사실보다 나폴레옹과 그 주변 사람들이 이 영웅에게 기대하는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쪽을 택했다. 물론 그 결과는 우리가 보듯 매우 멋들어지고 세련된 형상으로 귀결되었다.

예술가도 사람이므로 시대의 풍랑에 적극 뛰어드는 경우가 있다. 다비드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의 예술은 혁명을 통해 성숙했고 빛을 발했다. 물론 그만큼 그는 굴곡 많은 삶을 살아야 했다. 그렇게 숱한 정치적 파동 속에서 그의 예술은 빛과 그림자의 모든 영욕을 다 경험했다.

글 | 이주헌
미술평론가, 양현재단 이사

저작권자 © Arts & Cultur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