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란의 ‘브로드웨이 들여다보기’
[아츠앤컬쳐] 한국의 뮤지컬 시장은 이제 웬만한 브로드웨이 작품은 다 들어와 반복 흥행되고 있고, 브로드웨이와 시차가 거의 없이 신작들이 소개되거나 <닥터지바고>처럼 브로드웨이에 입성하기도 전에 국내에서 먼저 흥행되는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브로드웨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콘텐츠 고갈에 시달려 오고 있으며, 브로드웨이에서 들여올 만한 마땅한 작품을 찾지 못한 국내 제작자들은 몇 년 전부터 프랑스나 체코, 독일 등 유럽 쪽으로 눈을 돌려 <노틀담 드 빠리(프랑스)>, <로미오와 줄리엣(프랑스)>, <십계(프랑스)>, <햄릿(체코)>, <돈 주앙(프랑스)>, <엘리자벳(독일)> 등 유럽발 작품들을 줄줄이 들여와 흥행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유럽 시장에서 건질 수 있는 작품에도 한계가 있다.
지난 몇 년간 서울에서는 극장 수가 대거 늘어나 이제는 서울에서만 LG 아트센터(1,000석), 충무아트홀(1,255석), 샤롯데씨어터(1,240석),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1,800석)과 삼성카드홀(1,012석), 유니버설 아트센터(1,082),디큐브씨어터(1,242석), 극장용(805석), M씨어터(609석), 한전아트센터(1,000석) 그리고 재개관을 준비중인 토월극장(1,000석) 등 세종문화회관 대극장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제외하고도 뮤지컬을 전격적으로 올릴 수 있는 600석 이상짜리 극장이 11개에 이른다.
한 작품당 평균 3개월씩 공연을 한다고 쳐도 극장당 1년에 4편씩, 전체적으로 1년에 최소 44편은 쓸만한 작품이 있어야 이들 극장이 차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극장들이 조만간 콘텐츠 부족에 시달리게 될 거라는 얘기다. 반복 흥행되고 있는 <캐츠>나 <오페라의 유령>, <지킬 앤 하이드>, <미스 사이공>,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노틀담 드 빠리>, <맘마 미아!> 등은 이제 그 이름만으로도 관객들에게 피로감을 주고 있어 <엘리자벳>같이 뭔가 신선한 작품이 치고 나오지 않으면 시장의 꺾임세는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뮤지컬 창작이 절실한 이유이다. 이런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여 ‘대구 뮤지컬 페스티벌’, ‘창작팩토리’, ‘CJ크리에이티브 마인즈’ 등 뮤지컬 창작을 지원하는 움직임도 최근 몇 년간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뮤지컬 시장이 발달하려면, 그리하여 뮤지컬의 한류까지 넘볼 수 있게 되려면 뮤지컬의 기본 요소인 대본의 발굴이 필수적이다. 좋은 대본 없이 좋은 뮤지컬을 기대할 수 없다. 연극이든 영화든, 뮤지컬이든 가장 일차적이고 중요한 것은 좋은 스토리를 관객들에게 들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Libretto’라고도 불리는 뮤지컬의 ‘Book’은 뮤지컬의 요소 중 드라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이면서도 제작자들이 가장 관심을 안 가지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는 초기 뮤지컬에서 대본의 역할이라는 것이 고작 뮤지컬이 단순한 노래의 메들리가 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 뮤지컬들은 대부분이 음악과 스타배우를 핵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뮤지컬의 대본이란 그저 장면 또는 노래를 연결시키는 데 필요한 농담이나 개그 따위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관객은 그 이상을 원하게 되었고 따라서 음악과 대본은 결합력 있는 어떤 이야기를 잘 엮어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뮤지컬의 전체 러닝 타임 중 적어도 50% 정도는 춤과 노래에 할애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뮤지컬의 대본을 쓰는 작업은 연극 대본을 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된다. 완전하게 쓰여진 드라마 속에 춤과 노래를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골격만을 갖춘 상태에서 음악과 춤이 동시에 작업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작곡과 작사, 대본쓰기를 모두 할 수 있다면 매우 이상적인 뮤지컬이 나올 것이다. <렌트 Rent>의 작사, 작곡가 조나단 라슨Jonathan Larson, 그리고 <뮤지컬 돈 주앙>의 작곡, 작사, 대본을 맡았던 펠릭스 그레이처럼 말이다.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머리에서 줄줄 나온다면 뮤지컬은 그야말로 천의무봉할 것이다.
<렌트>는 익히 알려진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골격으로 조나단이 작사, 작곡을 모두 혼자 했으니 얼마나 작업하기가 쉬웠겠는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세 가지를 모두 잘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며,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적어도 두 사람, 많게는 네 사람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공동작업을 해야만 하는 것이 뮤지컬이다. 흔히들 좋은 뮤지컬 넘버는 전환, 깨달음, 또는 결심 등의 순간에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이런 장면을 위해서 대본작가는 작곡가 그리고 작사자와 밀접하게 공동작업을 해야만 하며, 이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노래들이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자연스럽게 엮여 들어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대본과 음악이 동시에 쓰여지는 것이며, 대본이 먼저 쓰여진 다음에 거기에 노래를 끼워 맞추거나, 노래가 쓰여진 다음에 거기에 대본을 맞추는 것은 어색함을 자초하는 지름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하다 보면 좋다고 생각되는 노래가 아까워 버리지 못하고 노래에 장면을 끼워 맞추려 하거나 대사가 너무 길어질 경우 적당히 노래를 끼워 넣거나 하는 억지 작업이 발생하기도 한다.
뮤지컬 대본은 스토리 라인이 분명하고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캐릭터 간의 관계가 복잡해서는 안 되며, 어느 순간이든 캐릭터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등장인물들이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노래 속으로 들락 달락 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뮤지컬 대본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플롯과 캐릭터 발전을 많은 부분 노래와 춤에 넘겨주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액션이 무뎌지지 않게 하여 관객들을 끝까지 잡아놓아야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대본은 심각할 수는 있으나 지루해서는 안 되며, 웃을 곳, 기뻐할 곳, 슬퍼할 곳을 적절히 배합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대본작가의 역량이다. 관객들은 익숙한 것에 안도하고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에 같은 노래를 반복하거나 중요대사를 한두 번 반복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플롯의 설득력이 없으면 뮤지컬은 실패한다. 등장인물들이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등장인물은 극 중에서 변화발전을 해야 하겠지만 그게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뜻이다.
현대 뮤지컬 대본은 거의 항상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객들도 2막으로 구성된 뮤지컬에 익숙해져 있다.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는 대부분의 뮤지컬들은 전체 관람시간이 2시간 45분 정도이다. 8시에 공연이 시작하면 늦어도 10시 45분쯤에는 끝이 난다. 물론 중간 휴식시간이 보통 20여 분 주어진다. 대부분 1900년대 초에 지어진 브로드웨이 극장들은 화장실이 비좁고, 관객들의 평균연령도 높아 동작도 상대적으로 느리기 때문에 20분은 기본으로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휴식시간을 길게 주는 진짜 이유는 중간 휴식시간에 판매고를 올리는 음료나 기념품 등의 매출이 극장 소유주에게 무시 못할 수입원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한국도 어느 극장을 가든지 고급화 일색으로 서민형 음식은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극장들의 식음료 매출은 엄청나리라 생각된다. 돈이 없는 사람은 문화도 고프고, 어찌 어찌하여 공연을 보러 가도 배도 고프게끔 모든 구조가 바뀌어 버렸으니, 요즘은 배가 고파야 뭔가 나올 수 있다던 예술분야에서조차 개천에서 용 나올 기회를 원천봉쇄 당하고 있다.
어쨌거나 중간 휴식은 대본작가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자 도전이다. 1막에서 스토리를 어떤 포인트에 올려놓지 못하면 1막만 보고 집에 가버리는 관객이 생길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는 입에서 입으로 퍼져 흥행부담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막의 엔딩보다는 2막의 엔딩이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관객들은 2막이 끝날 즈음이면 1막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오직 마지막 순간에 본 것만을 마음 속에 담고 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본작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진짜 강펀치를 날릴 수 있도록 틀을 짜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듯 뮤지컬의 대본을 쓰는 작업이 쉽지 않기 때문에 100% 오리지널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뮤지컬을 만들려는 제작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이 소설, 영화, 연극 등을 각색하거나 역사적 인물 또는 역사적 사건들을 소재로 하려고 달려든다. 하지만 모든 스토리들이 뮤지컬 양식을 빌어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다른 양식을 빌었을 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어떤 사건이나 인물이 뮤지컬의 소재가 될 수 있으려면 등장인물들이 광범위한 감정적 기복을 겪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희망에서 기쁨으로, 기쁨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다시 성공으로 등등 뭔가 등장인물이 노래할 수 있는 상황이 계속 발생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팔자가 더럽게 세지’ 않은 인물은 뮤지컬의 캐릭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엘리자벳>의 엘리자벳처럼, <명성황후>의 명성황후처럼 굴곡지고 힘든 팔자를 지닌 캐릭터가 아니라면 별로 할 이야기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공한 뮤지컬이 되려면 뮤지컬의 등장인물이 어떤 형태로든 영웅적 특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오리지널 스토리는 작가가 이런 필요조건을 계산하여 맞춤형 스토리를 쓸 수 있다는 장점은 있겠으나, 잘못하면 황당무계한 캐릭터 또는 관객들이 별 관심 없어 할 평범한 캐릭터를 창조해 낼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영웅적 캐릭터에 길들여진 관객들이 그렇고 그런 범인의 이야기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 감정을 소비하고 싶지 않아 할 것이기 때문에 뮤지컬 대본작가는 오리지널 스토리를 만들 경우, 치밀하게 계산을 하여 캐릭터를 설정해야 한다. 한국 뮤지컬 관객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자아가 강해진’ 젊은 여성들은 황후나 공주, 영웅적 인물의 연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어 하지, 이웃집 아줌마 같은 캐릭터에는 전혀 열광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뮤지컬은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쓰여지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있을 정도로 뮤지컬 창작자들은 대본이든 노래든 끊임없이 고쳐쓰기를 반복해야 한다. 그 어느 대본이나 시나리오도 한방에 완벽하게 쓰여지지 않는다. 시, 소설을 불문하고 고쳐쓰기를 통해 작품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은 창작의 본질이다. 뮤지컬 대본 역시 다시 쓰기, 고쳐 쓰기, 수정은 기본이다. 아무리 리딩 Reading과 프리뷰 Preview를 제대로 했어도 관객 앞에서 공연되는 순간까지 문제점들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플롯 라인이 이상하고 스토리가 설득력이 없다면 흥행은 당연히 실패하게 된다. 공연의 길이 또한 흥행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몇 년 전 웨스트 엔드에서 만들어진 한 공연이 공연시간 3시간을 넘기면서 흥행에 완전히 실패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원천적으로 대본쓰기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뮤지컬이라도 관객은 두 시간 반이 넘어가면 인내심을 시험당하기 시작한다. 뮤지컬은 무조건 10시 45분 전에 막이 내려오도록 해야 한다. 10시 30분에 끝나주면 더 고마워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15분 길어지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생각하는 제작자가 있다면 백번 실패해도 싸다.
대본작가는 정직한 감정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정직한 분노, 정직한 기쁨, 정직한 공포, 정직한 놀람 등등… 인간의 순수하고 정직한 감정들을 무대에서 펼쳐 보이지 못한다면 뮤지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의 정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치열하게 드러낼 자신이 없는 사람은 뮤지컬 대본을 쓰지 말아야 한다. 뮤지컬 배우들의 치열한 연기를 보고 있으면 오랫동안 정리되지 않았던 모호한 감정들이 뚜렷한 꼴을 갖추고, 자아를 일깨우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들은 원천적으로 모두 배우가 아닌 대본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난히 ‘뮤지컬 코미디’에는 강세를 보이지만 ‘뮤지컬 드라마’로 가면 흔들리는 한국의 창작 뮤지컬들은 진정성과 심각성을 잃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글·김향란
뮤지컬파크 대표,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나라기획, 삼성영상사업단, ㈜서울예술기획, ㈜제미로 근무, 뮤지컬 계약 및 프러덕션 코디네이션 전문가로 국내 뮤지컬 사상 최대의 전환점이 되었던 <스텀프>, <캐츠>, <오페라의 유령>, <미녀와 야수>, <난타> 등의 계약 및 프러덕션 코디네이션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