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담배 파이프가 놓여 있는 빈센트의 의자, 1888캔버스에 유채, 93x73.5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반 고흐, 담배 파이프가 놓여 있는 빈센트의 의자, 1888캔버스에 유채, 93x73.5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아츠앤컬쳐] 초상화의 모델을 영어로 시터(sitter)라고 한다. 시터라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 모델은 대체로 앉아 있다. 자연히 의자가 중요한 소품으로 빈번히 등장한다. 앉은 자세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지표 가운데 하나다. 앉은 자세를 보조하는 의자가 원래 걷거나 뛰고 누워 쉬도록 되어 있는 인간의 신체구조에 반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신라 반가사유상>에서 알 수 있듯 ‘몸을 접음으로써 사유를 시작하는’ 인간의 특징 은, 바로 의자라는 보조도구에 의해 더욱 분명한 성격을 띤다. 그런 까닭에 회화에서 의자는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기호로 인식되어왔다.

물론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기호라 하더라도, 미술에서 의자는 조연, 혹은 엑스트라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인간이 앉기 위해 만든 것이니, 의자보다는 항상 의자에 앉은 사람이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간혹 예외가 있다. 인간의 부재를 나타내기 위해 의자가 그려진 경우다. 그러니까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로지 빈 의자만 그림에 등장할 때 그 의자는 비로소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반 고흐의 <담배 파이프가 놓여 있는 빈센트의 의자>다.

반 고흐의 그림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클로즈업된, 수수하고 투박한 의자다. 방 한 귀퉁이에 덩그마니 놓여 있는 의자 위에 화가의 담배 파이프가 누워 있다. 쓸쓸하고 외로운 정서가 진하게 배어 나온다. 지금 반 고흐의 의자에는 반 고흐가 앉아 있지 않다. 그는 부재중이다. 반 고흐가 이 그림을 통해 그리고자 한 것은 바로 ‘반 고흐 없음’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그는 부재중이 아니다. 다른 의자에 앉아 이 의자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 고흐의 의자를 바라보는 이는 타인이 아니라 반 고흐 자신이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현실에서 반 고흐의 부재를 절감하는 이가 타자가 아닌 반 고흐 자신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렇듯 주체가 자신의 부재를 느낀다는 것은 그에게 심각한 자아의 위기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스스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 타자가, 세상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이 나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커다란 상실감을 맛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그것이 효과가 없다고 느껴지면, 그는 결국 스스로도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반 고흐의 의자는 그 같은 자기 부정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 그래서 의자 위에 놓여 있는 파이프와 연초가 마치 투신자살한 사람이 벗어놓은 신발이나 옷가지 같이 느껴진다. 자기 부정은 자연스레 전 우주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고, 이 두 부정을 단 한 번의 행위로 완성시키는 것이 자살이다.

반 고흐, 고갱의 의자, 1888, 캔버스에 유채, 90.5x72.5cm,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반 고흐, 고갱의 의자, 1888, 캔버스에 유채, 90.5x72.5cm,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반 고흐가 그린 또 다른 의자 그림 <고갱의 의자>(1888) 역시 빈 의자를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의자의 주인인 고갱은 자신의 부재를 느끼지 못한다. 그의 부재를 느끼는 것은 이 그림을 그린 그의 친구 반 고흐다. 고갱은 지금 어디 갔을까?

고갱이 떠나기 전, 반 고흐는 아를에서 고갱과 한 지붕 아래 살며 함께 작업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둘 사이는 점점 멀어져갔고, 급기야 유명한 반 고흐의 ‘귀 자르기 자해 사건’이 있은 뒤 고갱은 영영 반 고흐의 곁을 떠났다. 그렇게 고갱의 부재는 반 고흐에 대한 부정을 의미했고, 그 부정의 이미지를 반 고흐는 이렇듯 아픈 마음을 담아 그렸다.

고갱의 의자는 반 고흐의 의자보다 좀 더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인다. 그 의자 위에는 노란 표지의 소설책 두 권과 촛불이 놓여 있다. 배경의 가스등이 암시하듯 시간은 밤이다. 이는 반 고흐의 의자가 낮에 그려진 것과 대비된다. 반 고흐의 의자는 공간을 구석구석 뒤지는 빛에 발가벗겨진 채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 고갱의 의자는 가라앉는 밤의 정조에싸여 무겁게 가라앉고 있다. 그 고요 속으로 퍼져나가는 촛불의 빛은 고갱의 예술혼을 상징하는 것이자, 그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반 고흐의 기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만큼 애절하고 감상적인 정서가 가득한 그림이다.

반 고흐의 예에서 보듯 주체가 스스로를 부재하는 자로 보는 것은 부조리다. 존재하는 자가 어떻게 동시에 부재할 수 있는가? 그러나 현대사회는 그 같은 부조리를 갈수록 조장한다. 가족의 해체, '왕따', 물신주의, 일등지상주의 등 여러 사회 현상들은 개인들로 하여금 존재가 왜곡되고 부정되는 공황적 경험을 빈번히 하게 한다. 반 고흐의 고독은 기실 그만의 고독이 아니며, 오늘날 모든 사람들의 소외를 예언하는 '전조
적 경험'이다.

빈 의자를 통해 미술이 이렇듯 인간의 부재와 부조리를 탐구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근대에 들어서의 일이다. 근대 이전의 미술에서는 이 같은 실존적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의자는 언제나 채워져 있었고, 또 언제나 존재의 힘과 권위를 상징했다. 이렇듯 의자가 늘 존재와 그 존재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충만했던 것은, 종교와 사회체제가 강력한 구속력을 가지고 통합력을 발휘해 사회 구성원들이 개인의 실존과 관련한 심각한 고민을 할 틈이 없었고, 또 그만큼 개인과 자유에 대한 근대적인 의식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고전 미술에서 의자는 대부분 적극적인 존재의 긍정, 나아가 모델이 권력자일 경우, 그가 지니고 있는 권위와 영광의 극대화를 위해 기능하는 기호로 그려지곤 했다. 그 대표적인 그림의 하나가 17세기 바로크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다.

1650|캔버스에 유채물감|141㎝×119㎝|이탈리아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1650|캔버스에 유채물감|141㎝×119㎝|이탈리아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그림의 구성은 단순한 편이다. 붉은 휘장이 드리운 배경을 뒤로 하고 교황이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다. 붉은색 바탕에 황금 테를 두른 의자는 단순한 듯하면서도 무척 권위적으로 보인다. 미간을 다소 찡그린 교황의 표정은 그 의자 못지않게 권위적이다. 지금 의자는 이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지닌 속내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높고 각진 의자는 조금도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고집을 드러낸다. 등받이의 황금 테는 그의 상반신을 그 안에 담는 액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의자가 이처럼 테두리가 되어줌으로써 그의 권위를 더욱 드높인다. 일종의 후광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가 사절이나 신하를 맞는 것도 바로 이 의자에 앉아 있을 때의 일이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지시하는 것도 바로 이 의자에 앉아 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여기 앉아 있다는 것은 세계가 그의 뜻에 따라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이 의자를 만지는데 있어서도 그의 손을 만지는 것만큼이나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의자는 그이고 그의 영광이다. 과거 권력자의 의자는 이처럼 언제나 존재와 권위와 영광으로 충만했다.

앵그르, 권좌의 나폴레옹 1세, 1806, 캔버스에 유채256x160cm, 앵발리드 군사박물관
앵그르, 권좌의 나폴레옹 1세, 1806, 캔버스에 유채256x160cm, 앵발리드 군사박물관

 

의자 등받이의 후광 효과와 관련해서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그린 <권좌의 나폴레옹 1세> 또한 인상적인 그림이다. 무지개처럼 둥그렇게 쳐진 황금 테는 나폴레옹에게 거의 신적인 권위를 부여한다. 팔걸이 앞부분의 독수리 형상 또한 지존으로서 그의 권위를 드러낸다. 의자 곳곳이 착석자의 영광을 위해 온갖 화려함으로 수놓아져 있는 것이다.

앵그르는 이 나폴레옹의 의자에 착안해 유사한 이미지의 작품을 하나 더 만들었다. 바로 <제우스와 테티스>라는 그림이다. 해발 2,950여 미터의 올림포스 산 정상 부근에는 봉우리를 등받이로 삼은 제우스의 의자가 있다고 한다. 높고 신령한 산의 정상이 신의 의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최고 권력자의 의자는 어쩌면 하나의 높은 산이라고 할 수 있다. 까마득히 높아 아무도 올라갈 엄두를 낼 수 없는 산에 앉은 자, 바로 그가 신이 점지한 권력자다. 테티스도 여신이지만, 그가 지금 권좌에 앉은 제우스에게 간청하는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다. 같은 신이라도 의자에 앉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이렇게 다르다.

서양의 고전 미술에서 의자는 이처럼 존재하는 자를 기리고, 그 권위와 영광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 신분제적, 전근대적 가치를 뒤엎은 것이 근대 혁명과 시민사회라고 한다면, 앞서 반 고흐의 그림에서 보듯 시민사회에서는 이제 자꾸 빈 의자가 늘어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모든 시민에게 권력자의 그것과 같은 권위가 주어지기는 커녕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 미술은 이처럼 의자가 비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단순한 차이를 통해서도 시대의 변화를 생생히 드러낸다. 의자가 그려진 그림을 볼 때마다 의자를 좀 더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양현재단 이사

저작권자 © Arts & Cultur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