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으로의 초대
[아츠앤컬쳐]하우저(S. Hauser)와 시도로바(K. Sidorova)의 ‘오블리비옹’을 감상하고 있자면 물론 그들의 넘치게 아름다운 퍼포먼스와 기막힌 호흡에 감탄을 하게 되지만, 무엇보다 피아졸라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된다. 깊고 어두우면서도 감미롭고 조화로운 소리가 품어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의 용해, 이것이 ‘오블리비옹’과 만나는 순간 일어나기 때문이다. ‘명료함’이 삶의 덕목으로 떠오른 지 오래인 요즈음, 탱고 한 가락이 삐걱대는 감정 사이의 혼돈을 잠재우는 것을 보면 음악의 힘이란 과연 이성을 능가함에 틀림이 없다.
피아졸라(A. Piazzolla)의 음악은 언제나 그랬다. 물론 당대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전위성과 실험성 때문에 현지 음악가들과 대중들의 비난을 감수해야했지만, 사실상 그의 음악은 혼돈이 아닌 조화에서 탄생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뉴욕과 프랑스 등 북미와 유럽을 오가며 그가 경험한 음악들은 탱고 안에 바로크와 재즈를 융합하게 했고, 기존 밴드(orquesta típica)를 넘어 실내악적 구성의 즉흥 연주까지를 불러왔다. 그럼에도 그 안에는 확장된 하모니와 변칙적인 리듬을 용해하는 대위법의 시퀀스들이 포진해있었으며, 이로 탄탄하고도 자연스러운 조화가 이루어졌다. 결국 그가 추구하던 누에보 탱고(nuevo tango)는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심장으로, 다가올 세대의 가슴에서 요동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요요마(Yo-Yo Ma)는 “음악이란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을 때 선택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 말하면서 “피아졸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권면하곤 했다. 실제로 그는 깊고 부드러운 사운드와 과감하고 날렵한 테크닉으로 피아졸라의 곡들을 재해석하여 한때 음반계의 거물로 떠올랐다. 그가 몇몇 콘서트에서 선보인 ‘오블리비옹’은 관객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바라는 신진 첼리스트들에게 매력적인 레파토리로 대물림된 지 오래다. 그러나 ‘오블리비옹’의 진가는 반도네온의 어둡고 쓸쓸한 음색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뛰어난 반도네온 주자였던 피아졸라는 마르코 벨로키오(M. Bellocchio) 감독의 영화인 <엔리코 4세(1982)>의 사운드트랙을 위해 이 곡을 작곡했다. 아버지가 뉴욕의 전당포에서 발견한 반도네온을 늘 소중하게 다루던 그는 이 곡으로 관객들에게 달콤한 망각을 선사하곤 했다.
피아졸라의 ‘오블리비옹’은 이상하리만치 가슴을 파고들며, 장르적 특성을 개입할 수 없는 망각의 공간과 만나게 한다. 아마도 끊임없이 사고(思考)해야 하는 인간의 삶에서 그 의무를 잠시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안위를 주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기억으로 과부화된 지성에서 벗어나, 대신 마음에 고착된 여러 감정들과 융화되며 망각으로 빠져드는 자신만의 공간... 피아졸라 역시 이 공간을 ‘오블리비옹’에서 경험했으리라. 그를 인정하지 않던 전통의 세계, 그가 취할 수 없었던 일률성을 내려놓고, 차라리 혼돈 속에서 조화롭게 존재하는 방식을 깨달았듯이. 그래서 그의 ‘오블리비옹’은 망각의 색으로 칠해진 추상화와 같이 느껴진다. 마치 작가의 친절한 설명이나 사실적 재현이 배제된 그림 한 점과 같이, 연주가의 테크닉이 진솔할수록, 많은 소리가 섞이지 않을수록 감상의 범위는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
수많은 ‘오블리비옹’ 중 가사를 지닌 버전을 감상하고자 한다면 이탈리아의 여가수 밀바(Milva)의 노래를 추천하고 싶다. 피아졸라가 ‘최상의 피아졸라 보컬’로 인정한 밀바의 노래에는 주어진 가사 안에 담아낼 수 있는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가 표현되어 있다. 그녀의 깊고 어두운 알토 톤의 목소리와 거친 비브라토, 감각적인 딕션의 내레이션, 극적 해석력과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는 1984년 라이브 음반인 <Milva & Ástor Piazzolla –Live at the Bouffes du Nord>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인 토마스 엘리엇(T. S. Eliot)이 말한 ‘잔인한 사월’을 혼돈과 목마름으로 겪는 이들에게, 밀바의 망각으로의 초대가 잠깐이라도 안위가 되기를 바란다.
글 | 길한나
보컬리스트, 브릿찌미디어 음악감독,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stradakk@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