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로이트
바이로이트

 

[아츠앤컬쳐] 1876년 8월 바이로이트, 바그너는 바이에른의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시작한 바이로이트 오페라 페스티벌의 총연습을 마쳤다. 공연을 본 귀빈들을 위한 파티에 참석한 한 젊은이는 그동안 자신이 존경하고 숭배하던 바그너를 바라보며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착각에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이날 이후 젊은이는 전 생애를 바쳐 바그너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저격수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위로를 받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세상에 던진 바로 그 니체다. 그의 나이 24세에유럽 문화계의 대스타 바그너와의 만남은 니체에게는 꿈같은 일이었다. 두 사람은 음악의 절대적 권위를 주장했던 쇼펜하우어를 추종했고 가족보다 더 친밀한 사이가 되었지만, 바이로이트페스티벌을 계기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니체는 그의 나이 여섯 살 목사였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할머니 집에 얹혀살았다.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았던 그는 신실한 목사였던 아버지와 달리 그는 기독교 신앙에 의구심을 품고 점차 교회는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이후 비스마르크가 일으킨 전쟁통에 군에 입대했다가 큰 부상으로 의가사제대라는 불행을 겪지만, 리츨 교수의 추천으로 라이프치히 대학으로부터 논문심사도 받지 않고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고, 바젤 대학에서 역사상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바그너와 니체의 만남 역시 리츨 교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는데 작곡에도 능하고 피아노 연주가 가능했던 니체가 평소 연습하던 곡이 바그너의 곡임을 교수가 알게 되어 둘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바그너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에도 뛰어났던 니체로부터 원본 ‘니벨룽의 반지’의 해석에 도움을 받았다. 서로 자주 왕래하다 보니 바그너의 집에 니체의 방이 따로 있었고 크리스마스 행사마저 바그너의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니체와 바그너는 거의 가족과 다름없었다.

뭉크의 절규, 바그너와 니체
뭉크의 절규, 바그너와 니체

 

니체가 교수로 임용된 이후 처음으로 출판한 <비극의 탄생(1872)>은 바그너에게 헌정되었다. 니체는 예술 중에서도 그림이나 조각처럼 물질적인 소유의 대상(아폴론적 예술)이 아닌 비물질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감성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세상에 필요하며, 진정한 디오니소스적 예술이 지배하는 세계관을 지향하는 바그너와 같은 사람이 무대를 만들어야 많은 사람이 순수예술에 열광하고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북유럽의 신화 속 신들의 캐릭터가 훨씬 단순하고 좀 더 인간과 가까워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면에서 귀족이나 신들의 이야기보다는 일반인들이 듣고 즐길 수 있는 가볍고 즐거운 오페라 부파를 옹호했던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도 공통점이 느껴진다. 그러나 <비극의 탄생>은 고전문헌 학계가 보기에 실증적증거가 아닌 형이상학적 비유법으로 바라보는 비과학적 방법이었기에 큰 비판을 받아 학계에서 왕따가 된다. 어찌 보면 바그너를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한 셈이었다.

이렇게 사랑하던 바그너와의 결별 이후 그는 <즐거운 학문(1882)>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7)>를 완성했다. 또한 <선악의 저편(1886)>, <도덕의 계보(1887)> 등으로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안티크리스트(1888)> 이후 <이 사람을 보라(1888)>, <니체 대 바그너(1889)>를 통해 바그너를 끈질기게 공격했다.

니체의 말년은 거의 인사불성의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게 되었지만, 문화계의 아방가르드 흐름을 타고 슈퍼스타가 되었는데 그 영향으로 뭉크가 ‘절규(1893)’를 그렸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교향곡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96)>를 작곡한다. 하지만 그의 여동생이 그의 영광과 부를 모두 가져갔다. 숨만 붙어있는 니체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는 파티를 열어 여동생은 부자가 되었고 니체 문서보관소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얻었다.

1900년 8월 25일 니체가 세상을 떠난 후 히틀러가 그곳을 들러 그의 지팡이를 받고 감동했고 니체가 저술을 포기했던 <권력에의 의지>를 여동생이 왜곡해 출판하면서 히틀러의 선전에 이용되었다. 니체의 여동생은 이렇게 평생을 편안하고 부유하게 지내다 갔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히틀러가 참석해 헌화했다니 정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 셈이다.

빚쟁이들을 피해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바그너의 생활은 넉넉지 못했기에 훗날 그는 파리로의 금의환향에 집착했다. 친분이 있던 비엔나 귀족을 통해 나폴레옹 3세를 설득해 가르니에 오페라하우스에서 <탄호이저(1845)>를 올릴 인생 기회를 잡았고, 프랑스 정부의 지원으로 어마어마한 예산과 리허설 기간을 확보했음에도 <탄호이저>는 프랑스 귀족들과 부르주아 출신 정치가들의 비난 속에 조기 종연의 굴욕을 맛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바그너에 대한 프랑스 작곡가들의 시기심과 불만이 극에 달해 호사가 사이에서 언쟁의 주요 메뉴가 되었다.

바그너 역시 프랑스 오페라계의 강자 마이어베어와 유명작곡가 멘델스존 등 유대인 음악가들에 대한 비난을 이어간 악연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바그너가 바이로이트 파르지팔의 공연 이후 건강의 악화로 베네치아에서 요양하다가 69세(1883년 2월 13일)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니체는 바그너 사후에도 그의 오페라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당시 니체가 찬양했던 오페라는 비제의 <카르멘(1875)>이다. 니체에게 있어 인간은 카르멘처럼 자유로운 존재여야 했으니 경직된 독일의 문화를 혐오한 니체는 자유로운 프랑스의 예술계를 언제나 동경했다.

바이로이트 오페라 축제 오프닝을 통해 문화 예술계의 대스타가 된 바그너가 왕과 귀족 및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니체가 느꼈던 상실감의 이유를 우리는 유추만 할 뿐 정확히는 모른다. 공식적으론 바그너가 변했다는 이유였지만 충분한 설명으로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니체도 변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미움도 큰 거라고. 관심 없는 상대에게는 눈길도 안 주는 게 인간이라고. 니체 역시 사랑에 목마른 한 인간일 뿐이었을까.


*2차대전 중 바그너의 추종자였던 히틀러와 바그너 가문의 인연 때문에 아직도 유대인들은 바그너의 음악을 금기시하고 있다.

 

신금호
신금호

글 | 신금호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www.mcultur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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