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1832년 빅토르 위고에게는 두 가지 이슈가 있었다. 소설 ‘레미제라블’의 역사적 배경이 된 프랑스 혁명 6월 혁명이 일어났으며, 희곡 ‘환락의 왕(Le roi s'amuse)’(1832)을 완성했다. 그러나 ‘환락의 왕’은 불행하게도 초연을 올리자마자 루이 필립 정부에 의해 50년간 공연금지 처분을 받았다. 실제로 ‘환락의 왕’은 1883년에야 50주년을 기념으로 재공연이 시작됐다.
‘환락의 왕’은 1520년대를 배경으로 프랑수아 1세(제위기간 1515~1547)의 환락의 삶을 다루었다. 빅토르 위고는 19세기 활동한 작가로 300년 전 왕의 이야기를 빌려와 자신의 시대에 절대 갑을관계에 대한 저항으로 희곡을 완성했다. 당시는 공화정에서 비록 의회가 있었으나 왕정으로 복귀한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을 희화했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됐다.
하지만 ‘환락의 왕’에게 공연금지 기간이었던 1857년에 대부분 같은 내용을 다룬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렛또’1851년 베네치아 초연는 파리 무대에 올려졌다. 보마르쉐의 ‘피가로의 결혼’이 루이 16세에 의해 공연 금지되었을 때도 빈에서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무대에 올라간 걸 보면 오페라에만은 관대했던 문화라도 있었나 싶은 의문이 든다. 어쩌면 오페라의 내용은 좀 과격해도 음악이란 포장이 있으니 사회적 파장까지 일으키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런데 빅토르 위고가 희화한 프랑수아 1세는 두 명의 왕비와 서너 명 정도의 정부를 두었지만, 당시 여러 왕들의 생활상과 비교해 딱히 넘치는 방탕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소설 속 허랑방탕한 이미지와는 달리 오히려 의외의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긴 왕이다.
그는 정말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학문과 언어에 능통했고 예술과 체육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어 프랑스 내 르네상스의 부흥을 위해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초청해 작품들을 남기게 했다. 대표적 아티스트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그는 다빈치를 설득해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내도록 했으며 다빈치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곁을 지켰다고도 한다. 왜 모나리자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지 알만하다. 심지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예술품들을 직접 수입해 오는 회사를 세웠을 정도였다.
그는 예술품뿐 아니라 본인이 관심이 많던 내용의 책들을 전 세계로부터 모았으며 직접 도서관을 세웠다. 또한 캐나다의 퀘벡주가 프랑스 언어를 쓰는 이유도 그가 후원했던 ‘자끄 카르티에’가 캐나다 동부 해안을 탐험하고 그곳을 지도에 캐나다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재 프랑스어가 예술계에서 중요한 언어로 쓰이고 있고 여러 나라에서 프랑스 언어가 쓰이는데도 프랑수아 1세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라틴어가 공용어였던 시절 프랑스어를 표준 언어로 과감히 선포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전 유럽 왕가의 공용어 역시 프랑스어였을 정도니 프랑스인들에게 마치 세종대왕같지 않을까?
물론 이런 다양한 업적은 절대군주로서의 영향력이 강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모 아니면 도인데 보통 강력한 군주의 권력은 성공적인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생긴다. 선왕 루이 12세 때부터 시작된 스페인과의 ‘이탈리아 전쟁’(1494~1559, 당시 이탈리아는 스페인의 영향권에 있던 도시 공국의 형태였다.)을 이어갔고, 스페인의 국왕이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와 합스부르크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수아 1세는 영국의 헨리 8세와의 긴박한 물밑접촉에 실패하자 그의 다음 선택지는 뜬금없는 오트만 제국이었다.헨리 8세의 첫 부인이 스페인 왕가 출신이라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은 어려웠을 것이다. 비록 튜더왕조의 기원이 프랑스로 망명했던 랭카스터 가문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교도였던 오트만 제국의 술탄 술레이만과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당시 기독교 국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 행보였다. 이 조약의 효과로 프랑수아 1세가 1525년 카를 5세의 군대에 포로로 잡혔을 때 오트만 제국의 술탄이 압박을 가해 프랑수아 1세를 풀어주게 했고, 버건디 지방에 대한 카를 5세의 욕심을 끊어내는 대신 이탈리아 나폴리와 밀라노 공국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마드리드 조약을 1526년에 맺게 되었다. 전쟁의 후반기에 접어든 1538년 휴전을 위해 니스에서 만나 조약을 맺기로 한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는 서로 대면조차하기를 꺼려 각자 다른 방에서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조약까지 맺고도 그들은 서로 죽을 때까지 전쟁을 치렀다. 얼마나 싫었으면 평생 지겹게 죽을 때까지 싸웠을까.
빅토르 위고의 희곡 ‘환락의 왕’에서 눈에 띄는 등장인물 중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몬테로네 백작으로 나오는 미스터 상 바이에장 푸아티에, 그는 유명한 메디치 가문의 캐서린과 결혼한 앙리 2세(프랑수아 1세의 아들)의 정부 다이아나 푸아티에의 아버지다. 그는 한때 프랑수아 1세에 의해 반역죄로 사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있다가 마드리드 조약(1526)을 계기로 풀려났다. 희곡과 오페라에서는 다이아나 푸아티에가 프랑수아 1세에게 유혹당해 인생을 망친 역할로 나오고 그녀의 아버지는 왕과 광대에게 저주를 퍼붓다가 처형당하는 인물로 나온다.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몬테로네의 저주테마는 서곡의 시작에서 관악기가 같은 음과 리듬으로 지속하는 모티브로 묘사된다. 그 음악이 나올 때마다 리골렛또는 몬테로네의 저주를 떠올린다. 세상의 모든 유혹으로부터 딸 질다를 보호하고자 했던 리골렛또는 그녀를 거의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도록 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자유롭고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그 틈을 파고들었던 만토바 공작은 본능적인 감각에 질다의 유모까지 매수할 수 있었던 유연함과 경제력까지 갖춘 나쁜 남자다. 나쁜 남자는 죽어야 하므로 리골렛또는 돈을 주고 살인을 청탁한다. 하지만 나쁜 남자를 사랑한 여인 질다는 모든 사실을 알고도 사랑 때문에 목숨을 던진다. 죽은 딸을 안고 광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딸을 죽였구나!”
빅토르 위고의 희곡 중 글로만 읽으면 짜증이 올라오는데 오페라를 보면 눈물이 흐른다. 참 나쁜 남자 같은 오페라다. 이런 종류의 영화나 소설 드라마를 볼 때마다 “나 같은 착한 남자들은 어쩌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글 | 신금호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www.mculture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