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촌
신한촌

[아츠앤컬쳐] 10월 17일, 러시아 오로라항공으로 2시간 30분을 비행하여 극동 러시아의 중심 도시인 하바로브스크에 도착했다. 1박을 하고 다음날 아무르 강가에 자리한 나나이족 마을인 ‘시카치일리야나’를 방문하고 근처에 있는 신석기 시대(1만4천 년전)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하바로브스크 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12시간을 달려 다음날 오전 8시 27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만주 등 해외로 퍼져나갔다. 연해주는 3·1운동 이전부터 수많은 의병과 독립지사들이 망명해 항일투쟁을 펼친 해외 독립운동의 요람이다.

1910년대 연해주 항일투쟁의 구심점은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라게르 산비탈에 자리한 신한촌(新韓村)이었다. 원래는 시내 중심가인 개척리(지금의 아르바트 거리 근처)에 한인들이 터를 닦았지만 일본인들에 의해 쫓겨나 신한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인들은 그 곳에 신개척리를 건설, 새로운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의미로 ‘신한촌’이라 명명하였다.

서북간도 및 연해주 한인사회를 배경으로 건설된 신한촌은 항일 민족지사들의 집결지였고, 나아가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로 발전했다. 이곳으로 망명하여 활동했던 인물은 이범윤(李範允)·홍범도(洪範圖)·유인석(柳麟錫)·이진룡(李鎭龍) 등이다. 헤이그 특사인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을 비롯, 북간도 용정촌(龍井村)과 서간도 삼원포(三源浦)에서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던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 미주에서 공립협회(共立協會)와 국민회를 조직·활동하던 정재관(鄭在寬)·이강(李剛)·김성무(金成茂)와 국내에서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활동하던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해 이종호(李鍾浩)· 이갑(李甲)·조성환(曺成煥)·유동열(柳東說) 등도 이곳으로 집결하였다.

그 밖에도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도 합세했으며, 기독교계의 이동휘(李東輝)와 대종교의 백순(白純) 등을 비롯한 애국계몽운동자들도 뒤이어 집결하였다. 이곳에 모인 항일 민족운동가들은 그곳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물들인 최재형(崔在亨)·최봉준(崔鳳俊)·문창범(文昌範)·김학만(金學萬) 등과 합력해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출처:위키백과]

한때는 1만여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1999년에 세워진 남한과 북한, 고려인 거주지를 상징하는 사각의 돌기둥 3개와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해외동포를 상징하는 작은 돌들로 만들어진 기념비를 통해서만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여 2009년 건립된 고려인문화센터가 세워진 우수리스크에서 독립운동을 도왔던 최재형 선생 거주지와 이상설 선생 유허지방문은 큰 의미가 있었다. 지금도 우수리스크에는 1만여 명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한국외대 경영대학원 글로벌CEO과정 30기 해외세미나로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인 연해주(Примор́ ский край),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방문은 매우 뜻깊은 여정이었다.

글 | 전동수 발행인
음악평론가, 코러스나우 예술감독, ITALIAN FILM & ART FESTIVAL 고문
서울그랜드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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