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한반도 중추인 태백산맥의 최고봉은 설악산 대청봉으로 1708미터다. 설악산의 한계령과 미시령을 경계로 서쪽 내설악의 백담계곡에 백담사가 있다.
백담계곡과 설악에 관한 기록으로 김수증(1624~1701)의 ‘곡운집’ 중 곡연기(曲淵記)에는 ‘한계와 설악 사이에 곡연이 있는데 땅이 수십 리에 이르며 고개의 동서를 차지한다. 사방이 험하여 사람이 통하지 못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지세가 평탄하고 넓어 밭을 일구고 살 만하다. 울창한 숲이 해를 가려도 토지가 비옥하여 산골짜기에서 생산하는 것은 없는 것이 없다. 수석의 뛰어남은 우리나라 제일이다. 간혹 심마니가 오고간다. 옛 집터가 하나 있는데 부자가 살던 곳 또는 동봉(東峯)이 소요하던 곳이라고 한다’고 쓰여 있다.
곡연은 백담계곡을 말하며, 동봉은 김시습을 말한다. 김시습은 세조를 피해 다니다가 오세암에서 머리를 깎고 숨은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한용운의 ‘백담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선 영조 때까지 화재로 소실되면 다시 짓기를 숱하게 반복하며 신라 원성왕 때는 운흥사, 고려 성종 때는 심원사, 조선 세종 때 선구사, 당대에 소실 후 영취사, 세조 때 백담사 등 여러 이름이 되었다.
영조 때 다시 소실되자 새로 짓고 심원사라 하였다가 정조 7년(1783년)에 최붕과 운담이 백담사라 개칭하였는데,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담이 100개가 있다고 하여 그리 된 것이라 전한다.
이후에도 1915년에 또 소실되어 다시 세운 것이 6·25 때 또 소실되어 지금의 백담사는 195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니, 기록만 보아도 여덟 번 화마를 입고 새로 지은 끈기있는 사찰이다.
백담사와 관련이 깊은 만해 한용운은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백담사에서 머리를 깎고 입산수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불교 개혁을 추진하고 민족독립운동을 구상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 33인의 대표로 독립선언 기념 연설을 하고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와 상대적으로 변절하여 친일파로 전락한 최남선, 이광수, 서정주라든가 마치 눈 멀고 귀 막은 듯 복사꽃이나 꾀꼬리 따위를 들먹이며 한가로운 정취를 노래하던 당시의 순수문학인들과 대비된다. 문학사 면에서 볼 때, 일제시대에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 끝에 돌아가신 이육사, 한용운 등은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분이다.
한용운은 일제가 조선의 불교를 훼손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조선사찰령 반대운동을 전개하며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과 시집 ‘님의 침묵’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백담사에는 한용운의 사상과 불교정신을 탐구해 볼 수 있는 만해기념관과 교육관, 연구관, 수련원, 도서관 등이 들어서 있다. 기념관은 1995년에 완공되었으며 내부에 유물과 그의 저서 초판본, 옥중 투쟁과 독립운동 자료 등이 있다.
영시암은 백담사에서 3.5킬로의 백담계곡을 지나 만나게 되는 가장 가까운 암자이다. 가는 길이 예술이다.
조선 후기 유학자 삼연 김창흡은 병자호란 때의 척화파 김상헌의 증손자인데, 아름다운 산수를 즐기고 세상에 출사할 뜻을 두지 않았다. 노론을 대표하는 가문의 인물이나, 시에 있어서는 당파를 초월하여 인정받는 시인이자 성리학자로도 명망이 높았다.
기사환국(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사건)으로 부친 김수항이 사사되고 모친마저 세상을 뜨자 설악산 은거를 결심하고 1707년에 심원사 남쪽 조원봉 아래에 벽운정사를 지었다.
이듬해 불이 나자 서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다시 영시암을 짓게 되었다. 그는 영원히 은거하려 했으나, 1714년 11월, 함께 지내던 거사가 호랑이에 물려 변을 당하자 떠나게 되면서 영시암은 폐허가 되었다. 그는 백담계곡 입구 용대리에 갈역정사를 짓고 머물며 영시암을 그리워했지만 다시 돌아가지는 않았다.
설정 선사가 영조 36년(1760년)에 영시암을 중건하며 유학자의 거처에서 사찰로 변모하였다. 6·25전쟁으로 전각들이 불에 타버렸으나 전각을 새로 지어 지금은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문화적 공간이 되었다.
백담사와 영시암 사이 백담계곡은 숲과 계곡 사이로 평탄한 길이 잘 닦여 있다. 숲길도 아름답고 계곡의 물소리가 시원하여 조선의 선비가 아니어도 가히 숨어들어 살 만하다.
영시암 삼성전에 오르면 속세를 떠나 설악과 달에 취해 살던 김창흡의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글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