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이탈리아의 뜨거운 8월, 태양에 달궈진 광장 돌바닥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 사람들의 발길이 약속이나 한 듯 한곳으로 향한다. 바로 젤라테리아(Gelateria)다. 진열장 속 다채로운 색감의 젤라또는 단순한 디저트가 아니다. 르네상스의 예술혼과 야심만만한 사업가의 꿈, 그리고 혁명가들의 열정이 뒤섞여 탄생한, 혀끝으로 맛보는 한 편의 역사다. 한 스쿱 입에 넣을 때마다 수백 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그 어떤 디저트도 젤라또만큼 풍부한 문화적 유산과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젤라또의 먼 조상은 고대 로마 시대, 네로 황제가 즐겼다는 과일 얼음, 즉 셔벳(Sorbetto)이었다. 당시에는 알프스에서 가져온 눈과 얼음에 꿀과 과일즙을 섞어 만들었다. 하지만 젤라또의 진정한 서막은 16세기 피렌체, 예술과 권력의 심장부에서 열린다. 당시 메디치 가문의 총애를 받던 천재 예술가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 그는 건축, 무대 연출, 심지어 화려한 불꽃놀이까지 도맡았던 진정한 르네상스형 천재였다. 그에게 스페인 사절단을 위한 연회 디저트는 또 하나의 ‘걸작’을 선보일 무대였다. 그는 셔벗의 한계를 넘어 우유와 계란, 그리고 와인을 얼리는 대담한 시도를 했고, 그렇게 탄생한 크림 형태의 ‘달콤한 눈’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발명품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의 혁신적인 시도는 젤라또가 단순한 얼음 디저트를 넘어선 크리미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젤라또의 원형이 된다.

이후 카트리나 데 메디치가 프랑스 왕비가 되며 가져간 젤라또 레시피는 한동안 ‘국가 기밀’처럼 여겨지며 궁정 안에 갇혀 있었다. 소수의 귀족만이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었던 셈이다. 이 비밀의 문을 활짝 연 것은 시칠리아 출신의 야심가 프란체스코 프로코피오였다. 그는 1686년 파리의 심장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카페 프로코프’를 열고, 역사상 처음으로 젤라또를 대중에게 판매하기 시작한다.

이곳은 곧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모이는 살롱이 되었다. 볼테르가 젤라또를 맛보며 영감을 얻고, 루소와 디드로가 백과사전을 논했으며, 벤저민 프랭클린이 미국 헌법의 조항을 다듬던 바로 그 자리에서, 젤라또는 혁명의 열기를 식히는 달콤한 위안이 되어주었다. 젤라또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 지식인들의 교류와 사색을 돕는 문화적 상징이 된 것이다. 파리의 지적 교류의 장에서 젤라또는 혁명의 불꽃과 함께 달콤한 위로를 제공했다.

daniel-gomez--gelato-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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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젤라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아이스크림과 무엇이 다를까? 가장 큰 차이점은 공기 함량에 있다. 공기를 듬뿍 주입해 몸집을 부풀린 아이스크림과 달리, 젤라또는 공기 함량을 줄여 쫀득하고 밀도 높은 질감을 자랑한다. 또한, 유지방보다 우유를 많이 사용하여 원재료 본연의 맛이 훨씬 더 폭발적으로 살아난다. 이는 ‘진짜’의 맛을 보여주겠다는 이탈리아 장인들의 고집스러운 철학이 담긴 결과다. 숙련된 젤라띠에레(Gelatiere)는 매일 신선한 재료로 소량씩 만들어내며, 재료의 맛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데 집중한다. 이러한 정성과 고집이 젤라또의 독보적인 맛과 질감을 만들어내는 비결이다.

그러니 올여름 젤라또를 맛볼 땐, 잠시 눈을 감고 그 묵직하고 진한 맛을 음미해 보시길 바란다. 그것은 단순한 단맛이 아니라, 르네상스의 창의성과 계몽주의의 열정이 DNA처럼 각인된, 우리 시대에 남겨진 가장 달콤한 유산일 것이다. 젤라또 한 스쿱에 담긴 이탈리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장인의 혼을 느껴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글 ㅣ 김수정

(주)파인푸드랩 대표 | 한국식음료세계협회 회장 | 경희대학교 캠퍼스타운, 서울먹거리창업센터 멘토. 12년 경력의 식품 개발 전문가, 한식진흥원 및 다수 기업/지자체 레시피 개발 및 강의. chefcrystal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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