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이탈리아 모데나의 어느 고풍스러운 저택, 지하실 깊숙한 곳에서 50년을 기다린 보물 하나가 잠들어 있다. 오크통에서 밤나무통으로, 다시 벚나무통으로 옮겨지며 세월의 흔적을 품어온 이 검은 액체는 바로 전통 발사믹 식초다.
마트에서 쉽게 만나는 그 식초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진짜 모데나 발사믹 식초는 포도즙을 졸여 만든 농축액을 최소 12년, 길게는 100년까지 숙성시킨 액체 예술품이다. 매년 나무통을 바꿔가며 숙성하는 동안 부피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지만, 그 대신 꿀처럼 진한 농도와 복합적인 풍미를 얻게 된다.
딸의 혼수품에서 황제의 특별 요청까지
흥미롭게도 이 식초에는 로맨틱한 전설이 따른다. 중세 시대 모데나의 귀족들은 딸이 태어나면 포도즙을 나무통에 넣고 숙성을 시작했다. 딸이 결혼할 무렵이면 완성된 발사믹 식초를 혼수품으로 내어주었는데, 이는 가문의 역사와 정성을 고스란히 담은 선물이었다. 신부의 나이만큼 숙성된 이 '액체 보석'은 새로운 가정의 건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였다.
특히 16세기에는 페라라 공작부인 루크레치아 보르지아가 출산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모데나의 발사믹 식초를 특별히 요청했다는 흥미로운 기록도 남아있다. 이처럼 발사믹 식초는 단순한 조미료를 넘어 귀족 여성들의 건강을 지키는 귀한 약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발사믹이라는 이름 자체가 '치유'를 뜻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과거 모데나 사람들은 이 검은 식초를 만병통치약처럼 여겼다. 감기에 걸리면 한 숟가락, 소화가 안되면 몇 방울... 심지어 11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가 모데나의 보니파치오 후작에게 이 귀한 식초를 요청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장인의 손길이 만드는 기적
전통 발사믹 식초 제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다. 트레비아노 포도를 주원료로 사용하며, 이를 구리 냄비에서 24시간 이상 끓여 원액의 30% 수준까지 농축시킨다. 이후 최소 5개 이상의 서로 다른 나무통을 거치며 숙성되는데, 각각의 나무가 고유한 향과 맛을 더한다.
오크통은 바닐라 향을, 체리나무통은 과일향을, 밤나무통은 탄닌을 선사한다. 매년 겨울마다 장인들은 정성스럽게 한 통에서 다른 통으로 식초를 옮기며, 이 과정에서 자연 증발로 인해 양은 점점 줄어든다. 50년 숙성 제품의 경우 처음 양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극소량만 남게 되는 이유다.
숙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온도와 습도 조절이다. 모데나의 다락방은 여름에는 40도가 넘고 겨울에는 영하로 떨어지는 극한의 온도 변화를 겪는다. 이런 자연스러운 온도 변화가 발사믹 식초만의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다.
현대적 가치를 지닌 전통의 맛
오늘날 진정한 전통 발사믹 식초는 DOP(원산지 보호) 인증을 받아야만 그 이름을 쓸 수 있다. 한 병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이 '검은 황금'은 샐러드 드레싱은 물론, 파르미지아노 치즈나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에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음식을 고급 요리로 탈바꿈시킨다.
미슐랭 스타 셰프들 사이에서는 25년 이상 숙성된 발사믹을 '액체 트뤼플'이라 부르며 극찬한다. 달콤하면서도 신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 식초는 고기 요리의 소스로, 치즈와의 페어링으로, 심지어 디저트의 마무리 터치로도 활용된다.
현재 모데나 지역에는 약 300여 개의 발사믹 식초 생산업체가 있지만, 진정한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이들은 대를 이어가며 비법을 전수하고 있으며, 일부 가문은 수백 년 된 나무통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시간의 마법사가 빚어낸 모데나의 발사믹 식초. 그 한 방울 속에는 이탈리아인들의 인내와 장인정신, 그리고 세월이 선사하는 깊은 풍미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진정한 슬로푸드의 철학을 보여주는 이 검은 보석은,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기다림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글 ㅣ 김수정
(주)파인푸드랩 대표 | 한국식음료세계협회 회장 | 경희대학교 캠퍼스타운, 서울먹거리창업센터 멘토 12년 경력의 식품 개발 전문가, 한식진흥원 및 다수 기업/지자체 레시피 개발 및 강의 이력 chefcrystalkim@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