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orah Borda LA Phil CEO가 지휘자 Gustavo Dudamel의 36번째 생일을 맞아연주회 직후 무대에서 Disney Concert Hall 모습의 생일 케이크를 선물하고 있다.
Deborah Borda LA Phil CEO가 지휘자 Gustavo Dudamel의 36번째 생일을 맞아연주회 직후 무대에서 Disney Concert Hall 모습의 생일 케이크를 선물하고 있다.

[아츠앤컬쳐] 10년 이상 장기 집권제가 좋을까, 4년 임기제가 좋을까. 헌법 개정을 앞둔 우리나라 대통령 임기에 관한 논의가 아니다. 미국의 한 오케스트라 CEO 임기에 관한 얘기다. 현대 민주 사회에서 누구도 10년 이상의 장기 집권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러시아 푸틴은 2000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17년간 통치 중이다.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된 주요 서방국가들은 러시아에서 푸틴의 장기 집권을 바람직하게 볼 것 같지는 않다.

미국 최고의 오케스트라는 어디인가. 막강 브라스의 시카고 심포니? 유려한 현의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개인적 Virtuoso가 가득한 뉴욕필? 귀는 주관적이어서 누구나 나름의 답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세계 최고 권위 언론 중 하나인 뉴욕타임스는 2017년 4월 21일자 1면 기사에서 “LA Phil is the most important orchestra in America.”라고 했다. 뉴욕 타임스는 왜 LA필을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오케스트라라고 했을까.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미국 최고, 아니 전 세계 최고 인기 지휘자 중의 한 명인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욕 타임스가 LA필과 관련된 1면 기사를 쓰게 된 배경은 두다멜 때문이 아니고 CEO 때문이었다. 우연인지 러시아 푸틴의 재임 기간과 같이 17년간 재직하며 LA필을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오케스트라로 만든 CEO 데보라 보다(Deborah Borda)가 갑작스럽게 LA필을 떠난다고 선언한 것을 1면 기사로 쓴 것이다.

이런 사건이 미국 최고 권위 일간지 1면 기사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나라 문화의 저력이다. 문화를 무척 좋아하고 편애하는 사람으로서도 1면 기사로는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해서 더욱 꼼꼼히 읽어보게 되었다. 결론은 완벽한 1면 기삿거리였다. LA필은 세계적으로는 물론이고 미국 입장에서도 전통적으로 문화와는 거리가 먼 서쪽 끝 태평양 연안의 변방 오케스트라였다. ‘전통이 없는 것이 전통’이라는 LA필이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오케스트라가 된 배경은 물론 그 뜨거운 두다멜 때문이지만 두다멜과 LA필을 조합시킨 것이 바로 데보라 보다이다.

먼저 지지부진하던 디즈니 콘서트홀을 건축가 Frank Gehry를 동원해 미국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의 하나로 만든 주역도 보다였고, 무명에 가까운 20대의 지휘자 두다멜을 과감하게 LA필 음악감독에 선임해 오늘날 최고의 클래식 스타로만든 것도 보다였다. 1백년이 넘는 동부의 전통적 오케스트라가 재정적 위기로 해체 위기까지 맞고 있는 상황에서, LA를 포함한 서부의 재벌들을 설득해 엄청난 기부금을 모아 LA필을 미국 최고 부자 오케스트라로 만든 것도 보다였다.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LA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도 보다였다.

LA필과 두다멜, 디즈니 콘서트홀은 문화 불모지 LA의 새로운 문화적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LA필, 나아가 LA라는 도시 전체의 천지개벽을 만든 데보라 보다가 갑자기 17년간 이어온 CEO 직을 떠난다고 하니 뉴욕타임스 1면 기사가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보다는 LA필을 떠나 뉴욕필을 살리기 위한 구원투수로 간다. 그녀는 LA필 CEO를 맡기 이전에 이미 뉴욕필 이사로 재직한 경력이 있다. 이제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뉴욕필의 CEO로 어려운 살림을 맡게 된 것이다. 보다가 뉴욕필에도 LA필에서와 같은 에너지와 활기를 불어넣어 미국 동서부 모두, 나아가 세계 문화계 전체가 생동감이 넘치기를 기대해 본다.

보다는 원래 비올라를 연주하던 음악인이었다. 그녀가 음악 경영인으로 LA필에서 탁월한 경영 성과를 거두자 세계적 명문 하버드대학교는 2015년부터는 그녀를 리더쉽스쿨 교수로 임명해 강의를 맡기고 있는 중이다. 비올라를 연주하던 보다가 어떻게 음악 경영인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또 LA필은 어떻게 그녀에게 17년이나 CEO를 맡길 수가 있었을까. 보다 때문에 오늘날 LA필이 큰 것이냐, LA필이 성공한 음악 경영인 보다를 만들었느냐. 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대통령이 5년의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우리나라 대법관,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은 임기가 6년에 불과하다. 김영란법으로 유명한 김영란 대법관은 2004년 48세의 나이에 대법관이 되어 54세에 퇴임했다. 자동적으로 전관예우를 만드는 사회구조인 것이다.

반면 미국은 대법관에 한 번 임명되면 종신직이다. 우리나라 주요 시립 오케스트라 지휘자들과 오케스트라 CEO들의 임기는 어떨까. 5년, 6년도 거의 없다. 민선 시장이 새로 선출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문화단체 책임자들을 바꾸는 일이었다. 임기는 대부분 3년 내외로 정해져 있으나 그나마도 채우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서울대 임헌정 교수가 부천필 초대 상임지휘자로 1989년부터 2014년까지 15년간 재임한 것이 부천시의 자랑이자 우리나라 전체로도 대기록이다. 전후가 어떻게 되었든 정명훈 씨가 상임지휘자로 있었던 2006년부터 2015년까지 9년간이 사실상 서울시향의 황금기였다.

시민들이 문화를 통해 행복할 수 있는 도시 또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 장기집권이 서로를 행복하게 하는, 또 다른 한국판 데보라 보다를 만날 수가 있을까.

글 | 강일모
국제예술대학교 총장
(사)한국음악협회 이사
경영학박사/ 음악학석사
president@ku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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