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집시, 낭테르, 프랑스, 1991
루마니아집시, 낭테르, 프랑스, 1991

 

[아츠앤컬쳐] “이 작은 지구별 위에서 사람으로 목숨 받고 태어난 우리는 저마다의 정량定量 을 갖고 태어났으리라. 우주가 담긴 ‘몸’ 만큼의 밥과 대지와 집과 짝과 꿈과 사랑을 갖고 태어났으리라” - 박노해 -

마케도니아 스텐코비치, 1999
마케도니아 스텐코비치, 1999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거장 성남훈 사진작가를 만났다. 그는 1991년부터 현재까지 루마니아, 보스니아,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지구촌 곳곳의 분쟁지역과 재난지역에서 정치, 경제, 환경, 종교 등의 갈등으로 불가피하게 유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과 선택의 여지 없이 안전한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야만 했던 그들의 목숨을 건 고난의 탈출현장을 20여 년 동안 흔들림 없이 사진에 담아오고 있다. 작가의 멘토(Mentor)인 요세프 쿠델카(Josef Koudelka)는 그에게 “사진에 있어 완벽함과 천재성이란 없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너만의 스타일로 하나의 테마에 오랜 시간 동안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화가를 꿈꾸었던 작가는 집안의 반대로 전주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 후 연극동아리를 통해 창작에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연극인으로 활동하며 체득한 극의 서사성과 작품분석 기법, 무대를 통해 이루어지는 관객과의 소통 방법은 그가 사진가로서 인생의 항로를 변경한 후 작품의 방향을 기획하는 데 유용한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아랄해, 우즈베키스탄, 2008
아랄해, 우즈베키스탄, 2008

그런데 작가는 어떠한 연유로 결코 녹록지 않은 ‘유민(流民)의 땅’이라는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그는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 ‘이카르 포토(Icart Photo)’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전공할 당시 그들이 사는 프랑스 파리 외곽에 위치한 낭테르(Nanterre)의 집시촌을 찾아갔어요. 집시들은 드럼통에 불을 피우고 카라반(caravan)에서 살고 있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황량한 들판에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는 낭만적인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는 이른 아침이었어요. 한 여자 아이가 혼자 밖에서 놀고 있더군요. 나는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렀는데 이상하게도 그 아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였죠. 그 후 나는 그 여자아이의 가족사진을 찍어주며 조금씩 그들과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운명 같았어요. 그런데 당시, 나는 집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어 용감하게 그들의 거주지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집시들은 폐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꽤 위험한 일이었죠. 만일 그때 그 아이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면 지금 성남훈의 사진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을 살며 한 번쯤은 숙명 같은 운명을 만나게 마련이다. 그에게는 1992년 멀리 떨어진 타국에서 어린 농아(聾啞) 집시를 통해 운명의 여신 클로토(Clotho)가 찾아왔다. 지구촌 유민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그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서사적이면서도 마치 하이쿠(俳句)와 같은 함축성과 탁월한 서정성을 보이며 늘 일정하게 36.5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과 첫 만남에서 느꼈던 같은 이방인으로서의 동질감 때문일 수도 있고 사진이 곧 나 자신이며 스스로를 시각 에세이 작가라고 믿는 그의 사진적 시각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시작된 ‘유민의 땅’ 프로젝트는 르 살롱 최우수사진상, 강원다큐멘터리 작가상, 한미사진상, 동강사진상, 월드프레스포토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영월사진박물관, 타슈켄트 국립사진센터, 국가인권위원회 등 다수의 기관과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가는 창조자가 아닌 해석자로서, 사진을 통해 세상을 제대로 통역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의‘소명’을 다짐하는 굳은 의지를 본다.

글 | 김이삭
전시기획자, Art Director, (주)이삭 아르테포베라 대표
director@issa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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