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08, 캔버스에 아크릴, 80cm x 117cm, 50호, 2015
길 위에서 08, 캔버스에 아크릴, 80cm x 117cm, 50호, 2015

 

[아츠앤컬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였던 야곱(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는 약 800km에 이르는 길이다.
1987년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가 출간된 이후 더욱 유명세를 탔으며, 또한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되어 유럽과 전 세계로부터의 성지순례가 활발해졌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고 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첫날 출발은 순탄했다. 아마 팜플로나까지도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진 길이라 크게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두 번째 마을을 지나고 나서부터 동행들과 대화가 눈에 띄게 줄었다. 더운 날씨, 힘든 걸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순례길이 주는 진지함이 말을 줄이고 생각을 깊게 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현재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길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좁은 숲길을 지나는가 싶다가 공원 옆길로 접어들고 마을로 들어서면 또 넓은 들이 펼쳐졌다. 우리의 삶의 길이 역시 이럴 것이다. 자신의 선택과 걸음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한다 하더라도 결국 그 길을 걸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다.

나는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일행과 떨어져 걷기로 했다. 다음 마을에서 만나기로 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걷고 또 혼자 걷는 길이 바로 이곳 산티아고 순례길이니까. 순례길 옆으로 공원이 내려다보인다. 가족이 나들이를 나왔는지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었다. 고기를 굽고 있는 아버지와 딸. 딸과 눈이 마주쳤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딸이 웃으며 손을 흔든다. “아디오스(adiós)” 나는 주뼛거리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면 항상 웃으며 인사를 한다. 부러웠다.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웃으며 인사를 하고 따뜻함을 나누는 것은 비단 나에게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난 마음이 차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차가운 마음을 낯선 누구에게 따뜻하게 드러내 보이겠는가. 그러나 그 소녀의 웃음은 내 차가운 마음을 조금은 녹이는 것 같았다. 마침 고개를 든 딸의 아버지도 손을 흔든다. 좋은 사람들이다. 알 수 없지만 좋은 사람들이었다. 난 이 길에서 불필요한 낡은 마음을 버리고, 차가운 마음을 조금은 녹이고 가야겠다 생각을 고쳤다. 버리다 보면 어느새 얻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혼자만의 시간은 한 시간 정도로 마치고 팜플로나 입구에 있는 마을 카페에서 일행을 다시 만났다. 오는 길이 힘들었나 보다. 여자 동행분이 조금 지쳐 보였다. 카페에서 물을 마시고 다시 출발했다.

우리의 첫 순례길 도보여행은 이렇게 지나갔다. 팜플로나 외곽에 있는 캠핑장에서 식사를 마치고 텐트에 모두 모여 앉아 와인을 마시며 우리의 용기와 여행을 위해 건배를 들었다. 첫날 일정으로 지친 탓에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난 텐트 밖으로 무수하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아쉽게 지나가는 오늘, 내 삶의 하루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글 | 배종훈
서양화가 겸 명상카툰과 일러스트 작가, 중학교 국어교사

저작권자 © Arts & Cultur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