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대륙 레이스 THE TRACK Outback Race2011
[아츠앤컬쳐] 힘들면 누구나 요령을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위해 혹은 좀 더 쉬운 길을 찾아 이리저리 몰려다니기도 한다. 정치권은 국민을 위하기보다 당리당략에 급급하다. 이 사회는 여전히 쉽게 돈을 벌기 위해 서로 속이고 사기를 친다. 가짜가 판을 친다. 학위 논문을 표절하고, 돈으로 자격증을 사고판다.
오지레이스에서도 경기가 진행되면 코스와 여정이 너무 힘들다 보니 선수들은 주로를 이탈해서 지름길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정해진 룰을 부정하며 경기 운영진에게 되레 화를 내기도 한다. 때로는 애써 경기를 포기할 핑계를 찾기도 한다.
2011년 5월, 호주 노던준주 엘리스 스프링스Alice Springs에는 전 세계 오지 마라톤 분야에 23명의 최강자들이 모여 열흘간 560km를 달리는 지구상 최장의 레이스가 열렸다. 이 대회 또한 자신의 식량과 장비를 짊어지고 달려야 하는 서바이벌 경기이다. 독일과 스페인 등 11개 국가에서 모여든 선수들은 토드몰Todd Mall에서 합류한 후 비박 장소로 함께 이동했다. 경기 전날, 장비검사를 마치고 경기규정과 지형에 대한 브리핑이 시작되자 선수들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코스는 엘리스 스프링스에서 호주의 정중앙인 에어즈 록Ayers Rock까지 광활한 대지와 능선, 호수와 협곡을 가로질러 열흘 밤낮을 달려야 했다. 레이스 첫째 날, 대회운영자인 프랑스 제롬Jérôme의 출발신호가 떨어지자 선수들은 마치 스프링처럼 튕겨 나갔다. 레이스는 가파른 산 능선과 협곡을 오르내리는 마운틴 코스로 시작됐다. 멀리 보이는 호주의 산야는 더없이 아름다웠지만 가까이 다가선 즐비한 암벽과 잡풀들은 칼날처럼 독이 올라 선수들을 위협했다. 종아리가 날카로운 바위에 스칠 때마다 사정없이 살점이 긁혀 나갔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어깨를 찍어 누르는 배낭의 하중은 체내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 듯 선수들을 휘청거리게 했다. 걸어서는 제한시간에 걸려 결코 완주할 수 없다는 것을 서로는 잘 알고 있었다. 낮에는 살을 녹이는 열사와 파리 떼로, 밤에는 추위와 들짐승들의 엄습에 몸을 도사려야 했다. 레이스가 계속될수록 몸은 부서지고, 인간의 감성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자국의 명예를 건 듯 선수들 사이에는 묘한 기류마저 흘렀다. 레이스가 시작된 지 이틀 만에 네 명의 선수가 경기를 포기했다. 탈락자가 속출하자 운영본부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레이스 거리를 530km로 단축해야 했다.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로 온 대지가 뜨겁게 타들어 가고, 노출된 내 목덜미와 종아리도 함께 익어갔다. 임도와 계곡, 강변과 하상河床을 따라 푸석한 흙먼지가 끊이지 않는 Bed river 코스가 이어졌다. 선수들은 살아남기 위해 먹고, 달리기 위해 먹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달렸다. 레이스 8일째, 온 대지가 화염에 휩싸였다. 자연발화로 산불이 난 것이다. 메케한 연기가 산야를 뒤덮었다. 불길은 주로走路 양옆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나는 두려움조차 상실한 채 불기둥 속을 뚫으며 오로지 지평선 반대편에 있을 캠프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호주의 산야를 울리는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로 거세게 울려왔다.
매일 밤 캠프는 물집과 인대가 늘어난 부상 선수로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 과욕이 부른 선수들의 최후는 극심한 고통과 상처로 얼룩졌다.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선수는 눈물을 머금고 레이스를 멈춰야 했다. 내 왼쪽 엄지발가락과 새끼발가락도 진즉 죽어 발톱이 흐물거렸다. 진물이 흘러 양말이 흥건히 젖었다. 어디로 장소를 옮기든 캠프 주변은 늘 생쥐와 개미떼로 들끓었다.
레이스 9일과 10일째, 지난 8일 동안 400km를 넘게 달린 터라 체내의 모든 진이 빠져버렸다. 이제 극한을 넘어 피니쉬 라인이 있는 에어즈 록으로 다가서는 무박 2일의 129km 구간만이 남았다. 에어즈 록은 호주 원주민들에겐 매우 신성시되는 곳으로 ‘그늘이 지난 장소’라는 뜻인 울룰루Uluru로 불렸다. 한발 한발이 작두 위를 걷는 듯한 고통이 발바닥에서 종아리를 타고 전신으로 전해왔다. 포기의 유혹이 다시 꿈틀거렸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내 안에는 ‘이만 포기하자’는 나와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더 가자’고 격려하는 또 하나의 내가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내 안에 남아있는 희미한 의식마저 무너져 내리게 하는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높은 빅듄(*Dune : 모래언덕)을 기어오르거나 울퉁불퉁한 광야의 자갈길을 달릴 때 머리는 곧게 가라고 신호를 보내는데 다리는 좀더 편한 길을 쫓아 갈지자之로 왔다 갔다 했다.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니 지렁이가 기어 온 것처럼 가관이었다. 오히려 더 오래 걸리고 힘들게 달려온 것이다. 배낭 속 장비와 마지막 남은 잡념까지 모두 던져버리지 않고는 완주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도 버릴 때의 간절함이 진짜 내
가 원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힘들지만 나는 정도正道를 선택했다. 이제껏 이보다 더 혹독한 레이스는 없었다. 23명의 출전 선수 중 17명만이 완주를 이뤄낸 죽음의 레이스. 선수 모두 냉철한 자기 통제와 절제가 없었다면 완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계’는 넘어서라고 존재하는 ‘경계’일 뿐. 무엇이든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도전하는 자, 인내하는 자 그래서 한계를 넘어서는 자만이 그에 걸맞은 결실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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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서울 강북구청(팀장)에서 근무하면서 10년 넘게 여행을 핑계 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달리고 있다. 제31회 ‘청백봉사상’과 2013 ‘올해의 닮고 싶은 인물상’을 수상했다. 강연(명강사 제128호, 한국강사협회 선정)과 집필 <미쳤다는 말을 들어야 후회 없는 인생이다>, 방송활동도 활발하다. 선거연수원 초빙교수도 겸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