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지난 밤 함박눈이 그렇게 많이 내릴 수가 없었다. 필자는 차 지붕 위에 새하얀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뭉치를 굴린 후 나뭇가지를 꺾어 눈과 입 그리고 팔을 만들어 붙이고는 장갑을 머리에 얹으니 꽤 그럴싸했다. 웃는 입을 가진 눈사람을 보고 있으니 왠지 눈사람이 나에게 말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아침이 되어 나가보니 앗! 차 지붕에 있어야 할 눈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그새 다 녹았나? 날씨가 추워서 그럴 리 없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머릿속으로는 “도둑이야!” 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현실 속의 나는 그냥 허망한 모습으로 눈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를 바라만 보았다. 세상에 살다 살다 눈사람 도둑은 처음 보았다. 그날 섭섭한 마음이 종일 마음 한구석을 차지했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2001)>는 글로벌 물류회사인 FEDEX의 비행사가 무인도에 떨어져 외로운 극한의 생존 생활하다 극적으로 구출되는 과정을 다룬다. 갖은 고생으로 생존에 적응하던 주인공이 유일한 친구였던 “배구공 윌슨”과 마침내 무인도 탈출을 감행하면서 풍랑을 만나 윌슨과 안타까운 이별을 하던 장면에서 마음이 찡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해가 뜨고 기온이 올라가면 녹아버릴 눈사람의 운명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이별은 이렇게 아쉽고 서운했다. 물론 가끔은 이별하는 편이 시원한 경우도 있지만... 이럴 때 생각나는 동화가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상기된 한 아이가 그림을 들고 와 소리친다. 자기가 아주 무서운 그림을 그렸다고. 하지만 어른들은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모자는 무서운 게 아니라고. 아이가 그린 것은 시시한 모자 따위가 아니라 무려 코끼리를 삼켜 버린 보아뱀인데 말이다. 아이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제 생각을 몰라주는 어른들이 없는 하늘에서 자유롭게 날 수 있기를 꿈꾸었고 결국 성장해서 비행사가 된다.
어느 날 사막에 불시착한 주인공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어린아이를 만나게 되는데 아이는 처음 보는 주인공에게 다짜고짜 양을 그려 달라고 한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주인공은 양을 그려 줬지만 아이는 번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퇴짜를 놓았다. 아이가 귀찮아진 주인공은 마지막으로 세 개의 구멍이 뚫린 상자를 그리고는 양은 이 상자 안에 있다고 말했다.
아이는 기뻐하며 그림을 받아 들었지만 이내 심각한 얼굴로 이 양이 풀을 많이 먹는지 물었다. 주인공은 어느새 아이의 눈높이로 대답했다. “작은 양이니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을 거야” 아이는 상자를 들여다보며 “그렇게 작지도 않은데...” 그리곤 양이 잠들었다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주인공은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정작 이 아이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이는 끊임없이 질문했지만 정작 주인공이 묻는 말에는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이는 자기 별에 갑자기 피어난 장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향기롭고 무척 아름다운 장미였지만 다른 한편으론 까다롭고 이해할 수 없는 꽃이었다. 그리고 그 꽃에 대한 복잡한 마음 때문에 아이는 별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이는 자신의 별에서 가까운 다른 별들을 방문해 여러 가지를 배우고 싶었다.
다른 별들의 주인들은 모두 어른들이었는데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는 아이에게 귀찮은 듯 정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 중에는 왕도 있었고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었고 별을 세면서 부자가 될 거라 믿는 사람도 있었고 가로등을 켜고 끄는 일을 계속 반복하는 이도 있었다.
이후에 주인공은 아이와 함께 사막에서 물을 찾았고 아름다운 석양도 함께 감상했다. 아이는 사막에서 자신을 다시 별로 보내줄 수 있다는 뱀을 만나기도 했으며 여우를 만나 친구가 된다. 사막에서 뱀은 이야기했다. 내가 너를 다시 너의 별로 보내줄 수 있다고.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고 어린 왕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장미가 있는 별로 돌아간다.
바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쓴 유명한 어린 왕자의 이야기다. 인류 역사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번역되고 팔린 대박 작품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생텍쥐페리는 1900년 프랑스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사업용 비행 조종사로 활동하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공군에 입대했고 이후 독일에 대항할 세력으로 미국의 참전을 설득하기 위해 28개월 동안 미국을 여행하는데 이때 영어와 프랑스어 2가지 버전으로 어린 왕자를 쓰게 된다.
실제로 생텍쥐페리에게는 사막에 불시착하고 5일 만에 구조된 경험이 있었다. 이때 생사의 갈림길에서 겪었던 현실과 환상의 사이에서 만난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과 친구가 되어주었던 사막여우, 목숨을 위협하던 독사 그리고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았던 경험들이 모여 아름다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가혹한 전쟁 속에서 세상에 찌든 어른들이 존재하지 않는 고요한 하늘에서 그의 생을 마감했다.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4년 7월 31일 생텍쥐페리는 최고령 전투조종사로서 비행 중 실종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2000년 마르세유 근처에서 그의 비행기 잔해와 이름이 쓰인 팔찌가 발견되면서 미스터리가 풀리기 전까지 그의 비행기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어 오랜 기간 그가 자신의 별을 찾아 사라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세간에 떠돌았다.
소설 <어린 왕자>는 연극, 영화 뮤지컬로 만들어졌고 마침내 오페라로도 만들어졌다. 작곡가 레이첼 포트만(Rachel Portman, 영화 <엠마> O.S.T. 작곡)이 니콜라스 롸이트(Nicholas Wright)의 대본으로 만든 오페라 <어린 왕자>는 미국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2003년 5월 31일)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가족 오페라로 2014년 4월 27일 한국 초연이 올려졌으며 최신 프로덕션이기때문에 저작권 라이선스 공연의 형태로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 영어 버전의 무대와 의상 디자인 콘셉트까지 그대로 가져와 공연되었다. 가족 오페라로 기획된 의도를 반영해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면 아이들이 보기에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영화도 원어로 듣고 자막을 보면서 충분히 감상하고 있는 걸 보면 영어 공연이 감상에 큰 방해물은 아닌듯하다.
“나는 너랑 놀고 싶어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줘.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만드는 거야. 지금 넌 나에게 여러 소년 중 하나에 불과하고 나는 너에게 평범한 한 마리 여우지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에게 필요하게 될 거야.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길들이지 않고는 그것을 알 수가 없어.”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다가올 수록 난 점점 행복해지겠지.”
“너의 별에 두고 온 장미꽃이 세상의 그 어떤 장미보다 소중한 이유는 네가 꽃에 쏟은 정성과 시간 때문이야.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잊었어.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해. 너는 네가 길들인 장미에 대한 책임이 있는 거야.”
눈사람과의 30분 만남도 이렇게 아쉬운데 나와 오랫동안 세월을 같이한 것들과 존재들을 떠나보내거나 내가 떠나야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 시간이 오기 전에 잘 하라는 2021년 함박눈 내리던 밤의 교훈이었다.
글 | 신금호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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