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es Leleu, 1924 ~ 1934
Jules Leleu, 1924 ~ 1934

 

[아츠앤컬쳐] <1925년 스타일>이라고도 불리는 <아르 데코 스타일> 가구는 20세기 초의 근대화와 국제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라인이 간소화되면서 기하학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며, 양질의 수입 원목 외에도 금속이나 가죽, 상아 등 소재의 차별화 및 고급화를 적용하였다. 그래서인지 현 유럽의 불경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르 데코 가구들은 경매시장에서 연일 높은 낙찰가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아르 데코>의 유래
1차 세계대전 이후, 세상은 과거의 잔재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아티스트들 또한 기존의 것을 타파하고, 혁신적인 성격을 강조한 창작 열기로 뜨거웠다. 가구를 포함한 장식미술분야에서도 이러한 흐름의 하나로 우선 영국과 오스트리아에서, 이어 프랑스에도 현대화 바람이 불었다. 당시 스위스 태생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는 자신의 저서인 <오늘날의 장식예술(L’art décoratif d’aujourd’hui)>을 통해 가구의 기능성을 철저히 강조했다. 즉, 현대의 건축물에 적합하도록 편리한 내부공간의 구성을 제시하며, 장식을 최소화한 디자인의 생활에 편리한 가구를 강조했다.

Jacques-Emile Ruhlmann, Cabinet état rectangle, 1922
Jacques-Emile Ruhlmann, Cabinet état rectangle, 1922

 

한편, 당시 파리 미술계는 <큐비즘>의 출현과 더불어, 몽마르트르의 시대는 지고, 몽파르나스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피카소를 중심으로 수많은 화가가 입체파 화풍으로 전향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비단 파리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화가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문학작품을 통하여 커트 머리의 톰보이 여성상이 등장하였다. 당시의 여성들은 코르셋을 벗어 던지고, 치마의 기장을 줄이며 활동적인신여성 시대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재즈 음악에 대한 열기는 특별했다. 이처럼, 지극히 미래지향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장식미술이라는 의미를 뜻하는 <아르 데코 스타일>이 탄생 한 것이다.

1925년 파리국제산업박람회 (L’exposition de 1925 à Paris) 19세기 후반부터 박람회의 개최와 더불어 유럽의 산업혁명은 더욱 빠른 속도로 확산하였다. 1851년 런던박람회의 크리스털 팰리스, 1889년 파리박람회의 에펠탑, 1900년 파리박람회의 그랑팔레와 프티팔레는 지금도 기념비적인 성과물로 평가되고 있다.

Paul Follot, Chaise, 1912
Paul Follot, Chaise, 1912

 

1925년 4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되었던 파리의 장식미술 및 산업박람회에는 총 21개국이 참가하였다. 본래 1915년에 예정되었던 박람회가 1차대전으로 중단되었다가, 10년 후에 열린 뜻깊은 자리였다. 참가국들은 독자적인 파빌리온에 자국의 건축과 디자인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발전된 산업을 전시하였다.

특히 가구, 유리공예, 도자기, 철 주조기술 등 산업디자인과 직결되는 아이템들이 주목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총 5천만 명의 관객이 박람회를 찾은 것으로 집계되며, 그 중 상당수의 외국인 거부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한편, 박람회의 긍정적 성과 중 프랑스의 실내디자인이 미국에 전격 수입되어 새로운 트랜드를 구축했다고 한다. 참고로 1930년에 완공된 뉴욕시의 크라이슬러 빌딩은 전형적인 아르 데코 스타일의 건축물이다.

한편, 이러한 디자인에 대한 붐은 지속해서 이어져 박람회 종료 후에는 대형 백화점이 그 역할을 이어갔다. 그 중 세계 최초의 백화점으로 알려진 파리의 봉마르쉐 백화점(Bon March)은 가구디자이너와 공동프로젝트로 한정 시리즈를 제작해 판매하기도 했다.

Jacques-Emile Ruhlmann, Long buffet, 1921
Jacques-Emile Ruhlmann, Long buffet, 1921

 

쟈크에밀 룰만 (Jacques-Emile Ruhlmann)
자크에밀 룰만(Jacques-Emile Ruhlmann, 1879~1933)은 프랑스 아르 데코 스타일의 가장 대표적인 가구디자이너이다. 그는 이미 1913년 프랑스의 국전에 해당하는 살롱오톤(Salon d’automne)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1925년 산업디자인박람회에서 프랑스 디자인을 전파하는 외교관이라고 칭할 정도로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룰만 가구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마치 프랑스의 국보처럼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기하학적인 라인을 살린 디자인에 특별한 소재로 포인트를 준 룰만의 가구는 ‘섬세한 고급스러움’으로 잘 알려져 있다. 룰만은 루이 16세 스타일의 영향을 받아서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재탄생시킨 실루엣이 우아한 가구를 선보였다.

또한, 특별한 소재의 선택으로도 정평이 나 있는데, 고급 수입목에 디테일은 상아나 천연가죽을 이용하여 포인트를 주었다. 이는 소재의 대비에서 오는 차가운 느낌과 따뜻한 느낌의 공존을 통해 새로운 가구 미학을 제시하였다. 탁월한 기술력으로 마감이 완벽하며, 원목의 색상과 상아의 흰색이 대비되어 멀리서도 눈에 띈다.

Jean Dunand, Table à jeux et ses quatre fauteuils escamotables, 1930
Jean Dunand, Table à jeux et ses quatre fauteuils escamotables, 1930

 

본래 룰만은 인테리어용 고급가구원자재를 판매하는 사업가 집안에서 자랐다. 그는 1901년 군대 제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익혔다. 또한, 그는 디자인 도면을 그리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수많은 가구 디자인 크로키를 했는데, 장식 디테일까지도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린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편 룰만은 1919년에 피에르 로랑(Pierre Laurent)과 함께 회사를 세워 192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ERL이라는 브랜드의 룰만의 기업에, 직원 수가 무려 600명이었다고 하니,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규모이다. ERL은 상공회의소나 박물관 등 국가의 주요기관뿐 아니라, 다수의 최고부유층의 실내인테리어 프로젝트를 맡아서 했다. 그리고 1933년 룰만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조카인 알프레트 포르트네브가 경영권을 계승했다. 물론 그때부터 생산된 가구에는 룰만의 도장은 찍히지 않았다.

글 | 이화행
아츠앤컬쳐 파리특파원, 큐레이터/ 아트컨설턴트, 파리예술경영대 EAC 출강
EAC 예술경영학 학·석 사 졸업, 소르본느대 Sorbonne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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