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어둠의 도시

Ian Lambot Aerial View 2. photo by Christina Jensen / Blue Lotus
Ian Lambot Aerial View 2. photo by Christina Jensen / Blue Lotus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서사가 허구일지라도 소재는 현실에서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에는 떠다니는 섬 라퓨타가 등장한다. 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섬은 작가가 이탈리아의 치비타 디 반뇨레죠, 프랑스의 몽생미셸, 크로아티아의 모토분, 잉카의 마추픽추 등 여러 장소를 스케치하며 탄생하였다.

Greg Girard’s ‘Children playing on Walled City rooftop’. Photo: Christina Jensen/Blue Lotus
Greg Girard’s ‘Children playing on Walled City rooftop’. Photo: Christina Jensen/Blue Lotus

홍콩에도 여러 예술작품 및 영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그리고 테마파크의 소재가 되는 곳이 있다. 그곳은 이른바 20세기 마지막 무법지대라 불렸던 구룡채성(九龍寨城, Kowloon Walled City)이다. 1998년 현재의 첵랍콕(Chek Lap Kok) 홍콩 국제 공항이 개항하기 전 옛 공항이던 카이탁(Kai Tak) 공항은 구룡시 한가운데 자리했었다.

Greg Girard's 'Rooftop and Plane'. photo by Christina Jensen / Blue Lotus
Greg Girard's 'Rooftop and Plane'. photo by Christina Jensen / Blue Lotus

당시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비행기가 건물들 사이를 비껴가며 아슬아슬하게 내려오던 모습은 홍콩의 상징적인 이미지 중 하나였다. 공항 근처 비행기가 착륙하며 닿을락말락했던 건물 중 하나가 구룡채성이었는데 3층 정도 높이였던 이 성채는 20세기 들어 불법으로 14층까지 증축되었다. 더 이상 증축되지 못한 이유도 낮은 고도로 착륙하는 비행기의 항로 때문이었다. 난개발로 비행기에 부딪힐 듯 아슬아슬한 높이의 구룡성채는 좁고 어둡고 열악한 곳으로 가난한 난민들이 모여 사는 난민캠프이자 악명 높은 슬럼가였다.

Greg Girard’s ‘Walled City, Tung Tau Tsuen Rd’. Photo: Christina Jensen/Blue Lotus
Greg Girard’s ‘Walled City, Tung Tau Tsuen Rd’. Photo: Christina Jensen/Blue Lotus

구룡채성의 역사는 19세기 초 송나라 때까지 올라간다. 지역 토산물이었던 소금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을 짓게 되었다. 아편전쟁 후 청은 홍콩과 카우룽 지역을 영국에 내주게 되는데 구룡채성의 관할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영국이 여러 구실을 들어 구룡채성 안에 있던 청 군대와 행정관을 1899년 모두 추방시켰음에도, 이 지역 관할권에 관한 상호 협약이 없어 영국과 중국 어느 쪽도 함부로 권한 행사를 할 수 없었다.

Ian Lambot's 'South Facade'. photo by Christina Jensen / Blue Lotus
Ian Lambot's 'South Facade'. photo by Christina Jensen / Blue Lotus

그 후 법과 공권력이 미치지 않은 이곳은 자연스럽게 불법 거주자들의 점유지가 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홍콩으로 모여든 많은 중국인들과 인도차이나 전쟁 난민에게 주권 공백 상태의 구룡채성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주지였다. 한정된 땅 위에 더 많은 사람이 살기 위해 전문 건축가도 없이 불과 0.03㎢의 면적에 불안전하고 빽빽하게 불법 중축을 계속했다. 1980년 후반에 들어서는 5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이 좁은 땅에 모여 살았는데 이는 30평에 약 150명 정도가 모여 산 것과 같은 비율이다. 이 기록은 인류 역사상 최대 밀집도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다.

Greg Girard’s ‘Noodle Factory and Family Residence’. Photo: Christina Jensen/Blue Lotus
Greg Girard’s ‘Noodle Factory and Family Residence’. Photo: Christina Jensen/Blue Lotus

건물 테두리에 위치한 집을 제외한 대부분의 집은 창도 없어 하루 종일 불을 켜야 할 만큼 어두웠고, 습한 홍콩의 날씨와 환기가 안 되는 구조 탓에 쥐와 벌레가 들끓었다. 그 모습은 현재 남겨진 사진으로만 봐도 괴기스럽고 으스스하다. 범죄의 소굴이자 비위생적인 곳이었기에 보건당국, 징세원 그리고 경찰들까지 접근을 꺼렸다.

무정부 상태의 무법지대였던 구룡채성은 매춘과 범죄자들의 소굴이기도 했지만,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중국에서 홍콩으로 넘어온 사람들 중에는 의사와 같은 고학력자도 있었으나 이들의 면허는 홍콩에서 인정되지 않았다. 구룡채성 안에는 중국에서 넘어온 이런 의사들의 불법 진료소가 서민들을 위해 매우 저렴하게 운영되고 있었다(그 진료소 옆은 도살장이나 매춘의 공간으로 비위생적이고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Ian Lambot's 'Stairway 1' (left) and 'Lung Chun Back Street' (right). photy by Christina Jensen / Blue Lotus
Ian Lambot's 'Stairway 1' (left) and 'Lung Chun Back Street' (right). photy by Christina Jensen / Blue Lotus

저소득계층과 난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지만, 구룡채성 중앙은쌓아올리지 않고 유치원과 노인정 시설을 두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을 서로 함께 양육하며 키웠다. 경찰 공권력이 닿지 않는 대신 주민들끼리 자경대를 꾸려 치안 유지도 했다. 그곳에 살던 주민들 상당수가 공동체 의식이 끈끈했던 그때를 그리워한다. 바깥 세상에서는 알 수 없었던 그들만의 왕국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영국이 몇 번에 걸쳐 구룡채성 재개발을 추진했을 때 거주민들의 반발은 매우 심했다.

Ian Lambot’s ‘South Facade’. Photo: Christina Jensen/Blue Lotus
Ian Lambot’s ‘South Facade’. Photo: Christina Jensen/Blue Lotus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인 1987년, 중국과 영국의 상호협약에 의해 구룡채성의 철거가 결정되고 1993년에 시작해 1994년 4월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번 4월은 정확히 해체 26주기인 셈이다.

구룡채성이 없어진 그 자리는 현재 시민들을 위한 구룡채성 공원이 조성되었다. 어둠의 도시였던 옛 구룡채성의 모형과 사진 영상물이 공원 한쪽에 전시되어 있다. 철거 직전 홍콩 정부는 일본 건축가들에게 의뢰해 도면을 남겼는데 이 도면에 의해 구룡채성은 많은 느와르 영화와 소설 소재를 제공하는 전설적인 도시로 기록되게 된다.

Greg Girard's 'Kowloon Walled City Night View from SW Corner'. photo by Christina Jensen / Blue Lotus
Greg Girard's 'Kowloon Walled City Night View from SW Corner'. photo by Christina Jensen / Blue Lotus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아시아의 할렘가나 공상 영화 속 파괴된 미래 지구의 모습을 그릴 때 구룡채성을 자주 인용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배트맨 비긴스’의 고담시 슬럼가, 영화 ‘공각기동대’ 시리즈의 아시아계 난민 구역,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슬럼가, 홍콩 영화 ‘쿵푸 허슬’ 속 돼지촌 등이 구룡채성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영화 ‘더 킹 오브 파이터즈’에서 야마자키 류지도 구룡채성에 살았던 설정이고 비디오 게임 ‘콜 오브 듀티’에서도 구룡채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룡채성의 도면을 그려간 일본은 가와사키에 구룡채성 테마파크(Kawasaki Warehouse)를 지었었다(2009년 개장~2019년 12월 폐장). 향수에 젖어 이 테마파크를 방문한 구룡채성 옛 거주민이 눈물을 흘릴 만큼 비슷했다고 한다. 캐나다 사진작가 그렉 지라드(Greg Girard)와 이안 램버트(Ian Lambert)는 구룡채성에 대한 경의로 ‘어둠의 도시(City of Darkness:Life in Kowloon Walled City in 1993)’란 타이틀을 붙여 1993년에 아트북을 냈고 2014년에 ‘어둠의 도시 재방문(City of Darkness Revisited)’으로 재출간했다.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수상 소감 중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고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을 언급했다. 그의 통찰력은 정확했다. 화려한 금융도시 홍콩의 20세기 발자취에도 어둡고 애환이 깃든 독특한 역사가 가득하다. 어둠에 가려져있던 홍콩의 다양한 모습들이 예술과 문화 속 새로운 소재로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있다.

사진 출처 : HKFP Lens
글 | 박희정
문화칼럼니스트, 아츠앤컬쳐 홍콩특파원, 2006 미스코리아 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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