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통상 누구의 후계자라는 말은 큰 실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바리톤 김기훈 씨는 스스로 불멸의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의 후계자로 표현되는 것이 영광이라고 말했다. 김기훈 씨는 지난 6월 19일 세계적 음악 경연대회인 영국 BBC 카디프 세계 성악가 콩쿨의 메인 부문(Main Prize)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다.
‘백학’으로 러시아인들의 가슴을 깊게 울린 흐보로스톱스키도 1989년 카디프 메인 부문에서 우승한 이후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한 바 있다. 2017년 55세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전 세계 팬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빈자리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다. 김기훈 씨가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쿨에 참가하여 노래를 부르자 러시아 언론과 심사위원들은 “바리톤 드미트리가 생각난다. 그가 없는 이 세상에서 다시 우리를 즐겁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평하며 그에게 2등 상을 주었다고 한다.
노래 잘하는 테너가 귀한 것에 비해 노래 잘하는 바리톤은 테너보다는 많은 편이다. 그러나 그 많은 바리톤들 중에서도 드미트리는 더 특별한 사람이었다. 드미트리도 카디프 콩쿨에 우승할 당시에는 보통 바리톤 중 한 명이었지만 40대, 50대로 나이가 들며 그의 음악적 인간적 매력과 무대 장악력은 오히려 더 폭발해 왔다. 특히 여성팬들은 드미트리의 원초적 마초적 남성성의 포로가 되었다. 그런 그가 너무나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지난달 바리톤 김기훈 씨가 참가했던 카디프 콩쿨의 심사위원인 소프라노 로버타 알렉산더는 김기훈 씨가 1차 결선 중 코른골트의 오페라 ‘죽음의 도시’ 중 ‘나의 그리움, 나의 망상이여(Mein Sehnen, mein Wähnen)’를 부르자 눈물을 흘렸다. 심사위원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BBC TV를 타고 전 영국에 생중계되었다. 김기훈 씨는 인터뷰에서 최종 경연 직전에 목이 잠겨 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 상황과 목이 겨우 풀리는 상황이 일주일이나 반복되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제일 먼저 부른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를 결정적으로 망쳐 입상은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1등을 했다. 왜냐하면 심사위원 알렉산더가 김기훈 씨가 1차 예선에서 ‘죽음의 도시‘를 노래할 때 마음속으로 이미 1등으로 결정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콩쿠르가 모두 끝나고 이런 정황을 김기훈 씨에게 직접 전해주었다고 한다. 김기훈 씨가 이미 1차 예선을 노래할 때 심사위원 알렉산더의 귀에는 저 불멸의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김기훈 씨의 노래가 드미트리의 빈자리를 채워나가자 심사위원으로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일 수 있는 눈물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같은 한국인으로 우리가 바리톤 김기훈 씨에게 거는 기대는 심사위원 알렉산더보다 더 크다. 김기훈 씨가 어떤 성악가, 어떤 음악가의 길을 걸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의 선택이자 권리다. 김기훈 씨는 성악가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성대결절로 오랫동안 고생해 왔다. 그는 이미 2016년부터 독일 하노버오페라의 전속 가수로 여러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해왔다. 너무 많은 오페라에 출연해 그간 콩쿨에 참가할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하노버오페라극장 측은 그에게 콩쿨 참가 휴가를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김기훈 씨는 앞으로도 2022년까지 독일, 영국, 미국, 러시아 주요 무대에서 계속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심사위원 소프라노 로버타 알렉산더가 김기훈 씨를 카디프 1차 예선부터 1등으로 결정했던 결정적 이유는 김기훈 씨의 폭풍과도 같은 엄청난 음량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가 표현해내는 섬세한 피아니시모였다고 본다. 김기훈 씨가 폭풍 같은 바리톤으로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드미트리의 후계자로 활약하는 스케줄을 대폭 줄이고, 목을 아끼며 오히려 더 많은 대중들이 사랑하는 편안한 음악으로 그가 더 잘할 수 있는 속삭이는 듯한 부드러운 피아노와 뛰어난 음악성으로 우리 옆에 오래도록 있어 주기를 기대한다.
글 | 강일모
경영학 박사, 에코 에너지 대표, 국제예술대학교 총장 역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