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인생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하고 그 방향과 속도를 예측하기 어렵다. 때문에 우리는 ‘오랜 시간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모두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 다이아몬드가 전자에 해당된다면 와인은 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상품이다. 와인은 그 품종뿐 아니라 어떤 지역에서 어떻게 자랐고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가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르다. 잘 익은 와인에는 그것의 인생이 담겨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잘 익어가다 정점 이후 쉽게 변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와인 애호가들은 잘 익은 와인의 가장 맛있는 순간을 즐기기 위해 큰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곤 한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2004년작 <사이드웨이>는 결혼을 앞둔 일주일 동안 캘리포니아 산타 바라라 지역의 와이너리를 돌며 마지막 자유를 누려보겠다는 잭(토머스 헤이든 처치)과 그의 절친 마일즈(폴 지아매티)의 여행 이야기이다.

이들 배우들의 영화 촬영 시 실제 나이가 각각 44와 37살로, 영화 속에서의 나이도 그즈음 어딘가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대부분 중년 아저씨들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주인공 마일즈(폴 지아매티)의 대사처럼 “돈, 능력 없으면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 신세들이다. 공자는 40대를 불혹의 나이라고 했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40대는 여전히 질풍노도의 시기이다. 다만 육체만이 전성기를 지나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사이드웨이> 두 주인공 마일즈와 잭은 누가 봐도 꽃중년과는 거리가 멀다. 마일즈는 이혼 후에도 전 부인을 잊지 못하는 영어 교사이고, 잭은 한물간 배우로 여자라면 일단 작업부터 걸고 보는 바람둥이이다.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먼, 배 나오고 머리 벗어진 아저씨들 둘이 떠나는 와인 여행은 그리 매력적일 것 같지 않다. 게다가 잭은 결혼 전 마지막 기회라며 여행에서 만난 여자는 다 작업을 걸겠다는 욕망으로 가득하다. 왠지 추태와 술주정으로 가득할 것 같아 선뜻 보고 싶어지는 영화가 아니다. 그런데 이 두 주인공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다. 샌디에고부터 시작하여 산타바바라까지 이어지는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풍경들도 관객들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게다가 이 둘에게 매력적인 여인들과의 위태롭지만 귀여운 로맨스도 생긴다.

마일즈는 소심남이지만 와인을 마시고 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활기가 넘친다. 그는 특히 피노 누아에 집착하는데, 그 이유를 “재배하기 까다로운 품종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피노 누아는 끊임없는 보살핌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잠재력을 이해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키워낸 사람만이 가장 고풍스럽고 빛나는 맛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맛은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다. 마일즈가 호감을 갖게 된 마야(버지니아 매드슨)의 말처럼 포도가 햇볕과 비를 맞으며 자라고 와인으로 성숙되어 어느 순간 최고의 맛을 내게 되지만 그 정점을 지나면 피할 수 없는 내리막이 시작된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렇게 만들어 낸 성공 이후에는 불가피하게 내리막을 걸어야 하는 인생과도 같다. 마일즈는 출판사에서 자신의 책을 출간하지 않겠다는 연락을 받고 자신의 인생의 반을 헛살았다며 괴로워한다. 그는 스스로를 제대로 된 맛을 내보지도 못한 채 향을 잃어가는 와인과 같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마일즈가 가장 아끼는 와인은 61년 산 슈발블랑이다. 그는 이 와인을 특별한 순간에 소중한 사람과 마시기 위해 보관해 두었지만 그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는다. 피노 누아처럼 까다로운 포도를 아름다운 와인으로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을 것처럼, 누구나 자신의 삶을 최고의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순간을 오랫동안 가져갈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언제가 각자 생의 최고 순간인지 알 수 없다. 마야는 특별한 순간을 기다리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슈발블랑을 열 때가 특별한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오지 않을 인생의 정점을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인생 최고의 순간을 결정하면 된다.

글 | 도영진
영화 칼럼니스트, 이십세기폭스 홈엔터테인먼트 한국 및 아시아 대표 역임
CJ E&M 전략기획담당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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