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through the Window_Marc Chagall(1913)
Paris through the Window_Marc Chagall(1913)

 

[아츠앤컬쳐] 구스타브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1832~1923)은 프랑스 파리에서 동남쪽에 있는 디종(Dijon) 출신으로, 파리의 국립고등기술공예학교(Arts et Métiers ParisTech)에서 공부한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공학자이다. 이후 에콜 상트랄 파리(Ecole Centrale Paris) 공과대학원 과정을 이수하고 잠시 진로에 대해 방황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에펠은 철도회사를 운영하는 샤를 누보(Charles Nubo)와 일을 하면서 토목건축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철도 회사에서 에펠이 맡은 첫 업무는 주철(鑄鐵)과 철판(鐵板) 등으로 만든 20m가 넘는 다리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이런 첫 건축에서도 에펠이 큰 무리 없이 공사를 마무리하자 누보는 에펠을 철도 설비회사로 자리를 옮기게 해준다.

그는 1858년 높이 25m짜리 교각(橋脚) 6개와 길이 500m짜리 철제(鐵製) 주형을 연결해 만드는 보르도(Bordeaux)교 건설공사의 총책임자로 일하게 된다. 성공적인 건설로 그곳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에펠은 1875년 포르투갈의 포르투(Porto)에 있는 도루(Douro)강에 길이 160m의 강철 아치교와 남부 프랑스 트뤼에르(Truyere)를 가로지르는 162m짜리 아치교인 가라비 고가교((Viaduc de Garabit)를 놓으면서 세계적인 건축가로 명성을 높인다. 당시 세계 최대의 공사로 알려진 가라비 고가교는 강 수면에서 120m 위에 놓인 다리였다.

eiffel tower_Georges Seurat(1889)
eiffel tower_Georges Seurat(1889)

바로 이 에펠이 만든 유명한 프랑스 파리의 건축물이 에펠탑(Eiffel Tower)이다. 이 탑은 공모전을 통해 에펠이 제출한 디자인이 선정되었고, 그가 건축에 책임을 맡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에펠탑은 1889년에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프랑스 정부에서 파리 만국 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de 1889)를 개최하였는데 이 박람회를 상징할 만한 기념물로 건축한 것이다.

에펠탑은 불과 27개월 만에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무려 9천 톤의 철골을 공작품을 만들 듯 하나씩 조립했고, 공사기간 동안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고 하니 그 치밀성이 놀랍다. 에펠탑은 현재 매년 수백만 명이 방문할 정도로 파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이다.

그런데 현재의 긍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에펠탑은 착공 초기부터 도시미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흉물스럽고 추악한 철 구조물'이라는 등 많은 비난이 있었다. 소설 「비계덩어리(Boule de Suif))」(1880)과 「여자의 일생(Une Vie)」(1883)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 대표적인 작가인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1850~1893)은 에펠탑을 특히나 싫어했다. 모파상은 일부러 에펠탑에 위치한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는 일화가 있다. 프랑스 어디서든 에펠탑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에펠탑이 안 보이는, 즉 에펠탑에 위치한 식당에서만 유일하게 식사를 했다는 것이다. 에펠탑을 싫어한 모파상의 대응 방식은 예술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The entrance to the Universal Exhibition of 1889 Paris showing the Eiffel tower_Jean Beraud(1890)
The entrance to the Universal Exhibition of 1889 Paris showing the Eiffel tower_Jean Beraud(1890)

실제 도시미관이나 경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건물의 건축을 중단하도록 또는 건축물을 철거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할까?

비슷한 사례로 우리나라에서도 건축 중인 아파트가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인 김포 장릉의 조망을 훼손한다는 이유 등으로 문화재청이 건설사에 아파트 건축 중지 처분을 내린 적이 있다. 이에 건설사들은 문화재청을 상대로 건축 중지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진행하였다.

장릉(章陵)은 조선 시대 인조(仁祖)(1595~1649)(재위:1623~1649)의 아버지인 원종과 그의 비 인헌왕후 구씨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건설사들은 2019년 인천 서구청장에게 착공신고를 한 다음 20층 아파트 9개동에 대한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2021년 건설사들에게 해당 아파트 부지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02호 장릉의 외곽경계 500m 이내라고 제시하면서, 이는 문화재청장이 2017년 고시한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에 속한다며, 건설사들이 문화재보호법 제35조에 따른 절차를 이행하지 않고 아파트를 건축하고 있음을 이유로, 문화재보호법 제42조에 따라 아파트 공사를 중지할 것을 명하는 공사중지명령을 하였다. 그리고 건설사들은 공사중지명령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법원은 장릉에서의 조망 침해에 관해 다음과 같이 판결하였다. 먼저 문화재청의 문화재 유형별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 내 건축행위 등에 관한 허용 검토기준에 의하면, 문화재 내부공간으로부터 외부로의 조망 범위는 안산(案山), 하천, 녹지지역 등 외부를 조망할 수 있는 핵심지점 또는 구간으로 정하고, 문화재 중 능ㆍ원ㆍ묘의 내외부 조망성의 경우에는 매장 주체와 관람자의 관점을 구분하여 검토하되, 능ㆍ원ㆍ묘가 일반적으로 주산(主山)을 배경으로 안산을 바라보고 입지함에 따라 내부의 주요 조망점에서 안산이 조망될 수 있는지 여부를 주로 검토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통상 관람자 관점인 정자각에서 홍살문 방향으로 바라보았을 때에는 주변의 조경수들로 가려져 현재 건축 중인 아파트는 보이지 않고(완성되어도 보이지 않음), 매장주체의 관점인 봉분 앞 혼유석에서 바라볼 때는 나무들 위로 여러 아파트들의 상층부가 보이며, 이로써 안산을 넘어 멀리 조산(朝山)에 해당하는 계양산 방면의 조망이 가려진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장릉 내에서 장릉 밖을 볼 때 조망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안산에서의 조망은 벌써 건축되어 입주하여 사람들이 살고 있는 기존 아파트로 인하여 이미 훼손되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고, 장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할 당시에도 외부 조망경관이 완전치 않다는 사실은 이미 고려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능ㆍ원ㆍ묘의 조망 침해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내부 조망점에서 안산이 조망될 수 있는지가 기준이고, 원칙적으로 그보다 원거리에 있는 조산의 조망까지 고려하도록 되어 있지 않은 점, 앞서 세계유산 등재신청 당시에도 능침(陵寢)에서의 조산 조망이 이미 훼손되어 있었던 점 등까지 고려하면, 조선왕릉의 세계유산 등재에 능침에서의 조산 조망 가능 여부가 주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더구나 해당 건축 중인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장릉의 외곽 경계로부터 500미터 밖에 위치한 다른 아파트 등에 의해서도 장릉의 조산 방향 조망경관이 침해되고 있는 점, 이에 문화재청의 제안대로 현 시점에서 건축중인 아파트를 조금 더 낮게 건설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건축물들에 가려져 계양산 극히 일부만이 보일 뿐이어서, 조망 상태가 크게 개선될 수는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아파트를 그대로 건축하더라도 장릉의 가치를 훼손하는 돌이킬 수 없는 경관의 파괴라고 보기도 어렵다.

추가적으로 아파트 공사가 착공되고 2년여가 지난 후에야 뒤늦게 문화재청에서 공사 관련 이슈를 제기한 점, 공사를 중지한다면 건설사들과 계약을 체결한 입주예정자들의 재산상 손해가 막대할 것으로 보이는 점도 고려하여 건설사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글 | 이재훈
성신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변호사, 변리사
문화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Arts & Cultur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