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여행은 원거리 연애와 공통점이 있다. 만나는 날짜가 정해지면서 벌써설렘으로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함께 있는 동안은 정해진 이별의 날을 향해 흐르는 시간이 너무 빠르고 아쉽게 느껴지며, 헤어진 후 긴 여운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그래서 헤어지자마자 또 다음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는 점이 그렇다.
지난 7월 후원회원 스무 명과 북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오페라 테마 여행을 다녀왔다. 낯선 환경과 새로운 경험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여행이 주는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이었는데 그 중심에 예술이 있었다. 우리는 관객이 되어 평소 흔하게 여기저기서 파편처럼 들어왔던 비발디의 사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듣고 가장 먼저 기립박수로 아티스트들에게 환호했다. 정성껏 차려입은 드레스와 아름다운 한복 차림으로 오페라에 참석해 다른 관객들은 물론 연주자들의 눈길도 사로잡으며 연주회의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다.
또한 수많은 세계적 예술가들을 배출한 왕립음악원에 방문했을 때는 단순한 견학자로서가 아닌 음악을 사랑하는 귀한 손님으로서 대접받았으며, 쇼팽이 연주했던 홀에서 필자와 현지 음악가들이 함께하는 연주회 맨 앞자리를 지키며 호흡을 같이했다. 예약이 어려운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아름답고 정성이 느껴지는 식사를 했고, 쉽게 경험할 수 없는 화려한 정통 잉글리시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시간도 있었으며, 골프의 성지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18코스 라운딩을 해보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무엇보다 책으로만 접하던 고흐, 모딜리아니, 피카소, 반다이크, 들라크루아, 세잔느, 루벤스, 카라바죠 등 많은 유명 화가의 작품들을 한철 흐드러지게 핀 꽃구경하듯 흔하게 그러나 맨눈으로 직접 보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괴테는 말했다. ‘좋은 것이라면 한 번쯤은 누려 봐야 한다.’라고. 그래야 어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는 뜻이다. 안목이 높아진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물론 안목이 없다고 불행한 건 아니다. 다만 눈을 뜨고 있으나 시각장애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게 아쉬울 뿐….
필자는 이번 여행지의 코스 중 하나인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를 과거에 여러 편 소개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을 고르라면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스>를 비롯하여 1835년 같은 해에 작곡된 도니젯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들>이 있다. 그리고 로시니의 <호수의 여인>, 프랑스 작곡가 오베르의 <라이체스터>,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프랑스 작곡가 부와엘디웨(Boieldieu)의 3막짜리 오페라 <흰 옷의 여인>이 있다.
18세기는 서구 유럽에서 스코틀랜드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오페라 <흰 옷의 여인>은 1825년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을 가졌는데, 18세기 중반 스코틀랜드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스코틀랜드에는 북유럽에서 이주한 바이킹들이 가져온 특별한 문화적 영향이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잉글랜드와는 새삼 다른 모습이 유럽인들에게는 흥미로웠을 것이다. 일전에도 한 번 스코틀랜드의 카트린 호수를 배경으로 한 <흰 옷의 여인>을 소개한 바 있는데 이번 작품 역시 스코틀랜드의 지폐에 등장하는 유명작가 월터 스콧 경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었다(에딘버러 시내 중심 Princes street에 어마어마한 크기로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어린 시절 유괴되어 행방이 묘연해진 쥴리안은 군인이 되어 마을로 돌아온다. 사실 그의 정체는 마을 성주의 유일한 상속자 아들이었다. 여주인공 안나는 본인 스스로도 잊고 있던 쥴리안의 정체를 흰옷 입은 여자 귀신으로 변장해 나타나 세상에 알려준다. 그리고 오페라의 마지막에 쥴리엔의 아내가 된다는 단순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워낙 원작이 유명했고 특히 당대 유명 *소프라노를 주인공 안나로 섭외해 오페라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여행이나 원거리 연애가 주는 에너지처럼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 그리워했던 연인들이 기다림 끝에 만났고 그 만남이 주는 사랑의 힘이 그들의 행동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바꾸게 되어 결국 그들이 지나왔던 불행한 운명의 여정을 해피엔딩으로 바꾸었다는 교훈의 이야기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라는 말이 있다. 거기에 한 마디를 더 붙이고 싶다.열정을 잃으면 정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라고. 시간과 돈은 언제나 부족하다. 조금 더 여유로워지면, 조금 더 많이 모이면 하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열정은 말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길의 장애물은 시간과 돈으로 넘는 것이 아닌 열정의 장대로 뛰어넘을 수 있음을 또 한 번 타국의 하늘 아래 느끼고 돌아온 여행이었다.
*초연에서 주인공 안나 역할을 했던 소프라노는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초연에 솔리스트로 무대에 섰던 비엔나 출신 유명 소프라노 Henriette Sontag였다. 그녀는 드라마틱한 레퍼토리뿐 아니라 소프라노 조수미와 같은 목소리의 콜로라투라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소프라노였다.
신금호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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