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레퀴엠은 우리말로 진혼곡이라고 한다. 이는 죽은 이의 넋을 달래는 곡이다. ‘Requiem’은 라틴어로 ‘안식’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여러 작곡가들이 레퀴엠을 작곡하여 자신들의 음악성을 자랑했는데, 그중에서도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역사적으로 가장 훌륭한 성악예술의 하나라고 칭송받는다. 모차르트의 합창곡 중에서도 ‘레퀴엠’은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그렇지만 이 유명한 작품을 모차르트가 모두 작곡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해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그의 제자 쥐스마이어와의 공동작품이라고 해야 한다.
모차르트는 그가 세상을 떠나는 해에 이 곡의 작곡을 시작했으나 결과적으로 이 음악은 작곡가 자신의 진혼곡이 되었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은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이라는 인물이 작곡가에게 의뢰했던 작품이었다. 백작은 1791년 2월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내를 추모할 목적으로 ‘레퀴엠’을 주문했던 것이다. 말년의 모차르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오페라 ‘마술피리’를 작곡하고 있었던 모차르트는 1791년 늦은 봄에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으로부터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 받았다. 작곡료는 50 두카텐(당시 국제 통화로 사용된 금화)이란 꽤 많은 금액이었고 절반을 선수금으로 받는 조건이었다. 이는 모차르트가 거절할 수 없는 액수였고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차르트는 다른 작품들 때문에 레퀴엠의 작곡을 9월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 초연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낼 수 없었으며, 9월 30일에 초연을 앞둔 ‘마술피리’ 때문에도 상당히 바쁜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고된 창작의 노고가 계속되는 와중에 모차르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11월 말로 들어서면서는 제자 프란츠 쥐스마이어의 도움을 받으면서 레퀴엠의 작곡을 이어 나갔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모차르트는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1991년 12월 5일에 모차르트는 운명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는 작품이 완성되지 못했음으로 인해 의뢰인에 대한 계약을 이행하지 못한 것을 걱정했다. 처음에 콘스탄체는 이 작품의 완성을 요제프 아이블러라는 인물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요제프 아이블러는 이 일을 해내지 못했으며 작품의 완성은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쥐스마이어에 의해 이루어졌다. 모차르트는 레퀴엠의 전반부를 완성했지만 나머지에 대해서는 초안 악보와 몇 가지 지시 사항만을 남겼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부분들은 작곡가의 유작 부분과 지시사항 등을 바탕으로 해서 제자인 프란츠 쥐스마이어가 완성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을 과연 온전한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느냐의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혹자들은 모차르트가 만든 부분들과 쥐스마이어가 만든 부분들이 작품성의 차이를 보인다고 하면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모차르트가 레퀴엠의 작곡을 시작한 것은 예술적 이유 외에도 경제적인 이유가 작용했음을 이미 말했다. 귀족으로부터 돈을 받고 그 귀족의 부인을 위한 음악을 작곡한 것이 작품 탄생의 모티브였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합창음악이자 종교음악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이 레퀴엠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 자신의 진혼곡이 되었다. 1793년 1월 2일, 궁정의 도서관장이었던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의 도움으로 미망인 콘스탄체를 위한 자선 연주회가 열렸다. 이날 미망인은 남편의 작품 ‘레퀴엠’을 처음으로 들었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고 13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글 | 이석렬
2015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심사위원, 2015 이데일리 문화대상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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