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음악가 말러는 작곡가로서의 삶과 지휘자로서의 삶이라는 두 가지 삶을 살았다. 만일 말러가 오늘날의 지휘자들처럼 많은 음반을 만들 수 있었다면 그는 우리에게 위대한 지휘자로도 다가왔을 것이다. 작곡가 말러는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4살 무렵에 아코디언으로 군대행진곡을 연주하고 얼마 후에는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7살에는 연하의 친구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15살 때에는 빈 음악원에 입학했으며 18살 때에는 음악원에서 학위를 받았다. 전형적인 천재의 징후를 보인 것이다.

그렇지만 말러는 가난한 집안의 자손이었다. 음악원을 졸업한 후에는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생계를 유지해갔지만 그것만으로는 생활고를 해결하기가 버거웠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20살의 젊은 나이에 지휘자란 직업을 갖게 된다. 그때부터 말러는 유럽 각지의 오페라극장들을 상대로 17년 정도를 지휘자로활약했다. 그 결과 지휘자로서는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출중한 실력의 완벽주의자 말러의 모습은 지휘자의 모습으로 먼저 다가왔다. 결국 말러는 37살의 나이에 유럽의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인 빈 왕립가극장의 음악 감독직을 맡게 된다.

빈 왕립 가극장에서도 말러는 뛰어난 지휘자로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그가 지닌 타고난 성깔머리 때문에 많은 갈등이 야기되었다. 그의 모진 성깔머리는 예술적 이상과 완벽주의 때문에 튀어나오는 것이긴 했지만, 단원들을 상대하는 말러의 태도는 가히 빈의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지휘자 말러는 무자비한 완벽주의자였다. 그가 단원들을 다루는 방식은 가혹하고 치열했다. 타인이 보기에 그는 광적인 이상주의자였다. 완벽주의자인 말러 앞에서 단원들은 예술적 역량이 부족한 어린 학생들처럼 취급당했으며 심지어는 한심한 존재들로까지 취급당했다. 참을 수 없을 때는 연주가 좋지 않은 단원들을 집어내서 따로 세워두고 연주를 시켰다.

스타일이 이러하니 완벽주의자 말러에게 많은 적들이 생겨났고 10년 후에는 빈 왕립 가극장을 스스로 사임하기에 이른다. 이런 갈등과 적대관계 속에서도 빈의 예술계에는 말러의 예술성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결과만 놓고 보면 말러의 완벽주의가 빈 오페라계의 연주력을 분명히 향상시켰던 것이다. 말러의 고압적인 태도는 때때로 청중들을 향하기도 했다. 속삭이거나 소음을 내는 청중들이 있으면 지휘대에서 돌아서서 그곳을 노려보곤 했다. 그러면 청중들은 놀라서 움츠러들었다. 말러의 아내 알마는 남편의 성향을 이렇게 표현했다.

"제 남편은 타협할 줄 모르는 악마에게 이끌려 다니는 사람입니다!”

지휘자로서의 완벽주의자 면모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드러났다. 47세가 되던 1907년 말러는 난생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 인생의 마지막 기간들을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지휘자로 활약한 것이다. 1911년 2월 20일 뉴욕에서의 공연이 말러에게는 마지막 지휘 무대가 되었다. 이때 말러는 편도선이 또다시 부어올라 의사로부터 연주회장에 가지 말도록 권유받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말러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고 사람들은 그를 옷으로 둘둘 감은 채 자동차에 태워 카네기홀로 싣고 갔다. 이날 공연에서 말러는 몹시도 기진맥진해져서 두통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신을 끝까지 차리고 모든 곡을 지휘했다. 이것이 그가 세인들을 상대한 마지막 콘서트였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말러는 굉장한 폭풍우가 부는 밤에 영면했다. 미소가 번지는 입술에선 모차르트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구스타브 말러의 모습을 예술가의 표상으로 여긴 알반 베르크는 말러의 사후에 그의 지휘봉을 입수했다. 알반 베르크는 그 지휘봉을 자신의 부적처럼 끝까지 간직했다고 한다. 알반 베르크의 생각대로 그 지휘봉은 위대한 지휘자가 남긴 위대한 상징물이었다!

글 | 이석렬
음악평론가,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심사위원, 전 대한민국 오늘의예술상 심사위원, 이데일리 문화대상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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